함께한이박삼일
함께한이박삼일
가족과더불어
2020-08-14 13:57:18
어렵게 성사가 되었지만 만나서 어울리고 보니 즐겁고 의미 있는 행사가 되었다. 날짜야 오래 전에 잡았지만 그놈의 장마가 문제였다. 하루를 앞두고 연락이 왔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 그만 두자는 말이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안전이 제일이라는 생각에 동의를 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에 옆사람은 문경새재로 떠났다. 그 모임도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가 겨우 성사되는 것 같았다. 출발하고 얼마 후에 "취소한 것을 다시 뒤집는다"고 연락이 왔다. 선택을 잘한 것인지 부모님의 음덕인지는 몰라도 2박 3일의 기간 동안 큰비가 내리지 않았다.
장마철이라 집이 눅눅한 것 같아서 앞집에 보일러를 가동 시켰다. 뒷집 큰방에도 마른 나무를 조금 넣고 불을 지폈다. 그리고 마당과 뒤안과 집안 구석구석의 풀을 뽑아서 손수레에 싣고 뒤뜰 논으로 갔다. 쌓아 두었다가 퇴비로 사용할 작정이다. 그러다가 보일러를 끄는 시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저녁무렵 손님이 도착했을 때만해도 방바닥이 후끈 달아 있었고 실내가 무척 더웠다. 평소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던 옆사람은 투덜거렸다.
저녁에 뒷집 부엌 문 앞 뜨럭에서 숯불을 피우고 대구서 공수해온 양념 곱창을 구워 먹으며 한잔씩 했다. 그리고 정담이 오고가다 10시가 조금 넘어서 끝이 났다. 여인네 세 사람은 앞집에서 잤다. 초저녁과는 달리 잘 무렵에는 방이 씩어서 춥지도 덥지 않은게 참 좋았다고 했다. 자형께서는 옆에서 텔레비젼을 켜면 주무실 수 없다고 뒷집 큰방에서 혼자 주무셨다. 그리고 매부가 혼자서는 못잔다고 해서 뒷집 사랑방에서 내가 동무를 해주었다.
바닥이 너무 차기에 내가 누운 쪽 전기 판넬에만 전원을 넣었다. 그런데도 매부는 덮다고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잔다. 그러다가 변을 당했다는 설이 떠올라 잠든 것을 확인하고 껐다. 그러고 얼마 후 다시 선풍기 돌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서방 옆에서 네가 자거라!"
"왜유?"
"나는 추운데 옆에서는 덥다고 하니 ~"
"나도 추위 마이 타요!"
"머? 그렁거까지 나를 달만노."
"좀 건강한 놈 골라서 주워야 하는데 다 엄마 탓이다!"
나만 추위를 많이 타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냉장고 물은 너무 차서 한여름에도 그늘에 둔 물을 마시게 된 것이 작년부터라고 했더니 여동생도 벌써 그렇다고 했다. 부부간에도 체질이나 취향이 비슷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문장대를 향해서 출발했다. 집에 있어봐야 술과 몸만 축난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했다. 운전은 매부가 하고 길잡이는 내가 했다. 쌍용계곡(농암면)과 용유계곡(화북면)을 지날 때 바위 위의 소나무가 멋있다고 해서 잠시 차를 세우고 촬영을 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를 혼자서 생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오십여년 전 갓 결혼한 20대의 누님께서 친정와서 고모님과 같이 화북 밤원(내서면) 달래(화서면) 등을 걸어서 두루 다녔던 이야기도 나왔다.
코로나 여파인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공원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나와서 출입자 명단을 적고 체온을 측정하셨다. 장마철이라 수량이 풍부한 오송폭포가 참으로 멋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아서 우리끼리만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돌아 오다가 관광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보고 나서 "물을 건너서 촬영을 했더라면 더 좋은 사진이 나왔을 걸"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성불사가 있었지만 다리도 아프고 지친 사람이 있었기에 남정네만 다녀왔다. 30여년 전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기억력이 문제인지 그동안 새로 지은 전각이 많은지 모든 것이 새로웠다. 관광객이 많은 부자절보다 작은 절에 시주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법당문이 잠기어 있어서 그냥 나왔다. 문만 잠긴 것이 아니고 비닐로 봉한 것을 보니 공사 중인것 같았다.
법주사를 안 본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다음 행선지로 정했다. 길잡이를 자처했지만 사실 내가 길눈이 어두워서 거기서부터는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대로 따라 갔다. 그런데 외손자를 보려고 청주를 왕래하면서 이용하던 길과 많이 겹쳤다. 장암리삼거리에서 용화(화북면) 장갑삼거리를 경유했는데 대략 40키로의 거리였다.
열흘 전 쯤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곳 이름이 생각이 안났다. 산채비빔밥이 정말 맛이 좋았기에 일행들께 대접하고 싶었다. 그래서 청주 사는 친구 박모씨에게 전화를 해서 "어래"라고 확인을 했다.
"자기가 맛이 좋았다고 남도 맛있는 줄 아냐"고 옆 사람이 또 한마디 했다. 그 때 그 사람은 나와 달리 능이탕을 먹었던 것이었다.
식당에 가서는 또 패가 나뉘어서 남자들은 불고기 백반 여자들은 산채비빔밥을 먹게 되었다. 두 가지 다 맛을 보기 위해서 내외가 옆에 앉자고 내가 제안을 했고 자리 이동을 했다. 그런데 불고기가 한 냄비에 담겨 휴대용 까스레인지에 얹혀 나왔고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지니 다시 자리 이동을 했다. 누님과 여동생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나왔다.
"거 봐 우리 남매들은 입맛이 비슷하거등!"
내가 옆사람보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이양반이 나하고 댕기더니 해학이 늘었다.
"응, 남이라도 맛은 있네"
"누가 남이야 ?" 또 누군가 옆에서 말했다.
그리고 사십하고도 몇 년 전의 가슴아픈 사연이 나왔다. 동생이 육학년 때 수학여행을 법주사로 가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못가게 하셨다고 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로지 맞아들인 나한테만 모든 것을 걸었던 아버지께서는 딱 삼년 더 사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그 빚은 오롯이 내 몫인데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언젠가는 동생들 그리고 누님들과 함께 멋진 수학여행을 다시 한번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점심 먹은 식당에서 법주사까지 연로하신 분이 걷기에는 무리라고 조금 더 가까이 가자고 차를 뺐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마지막 주차장이 나와서 차를 세웠다. 그 옛날 세조임금이 걸었던 길을 걸어서 법주사로 향했다. 걱정했던 누님께서도 무리 없이 잘 걸으셨다. 가는 도중에 예쁜 연꽃이 보였지만 드문드문 남은 것이라 카메라에는 잘 잡히지 않았다. 팔상전 쌍사자 석등 등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도 관람하고 금동미륵대불과 그 밑의 법당에도 들어가 참배를 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물이 새는 곳이 있었다. 물받이 용 항아리(어릴 때 말로 버지기) 속에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 참신한 발상을 보고는 "곳곳에 부실공사 투성이라"고 나오려던 육두문자는 들어갔다. 공과 허물이 서로 탕감된 것이라고나 할까.
돌아 나오는 길에 정이품송을 찾았다. 세조임금이 탄 가마가 지나가다가 소나무 가지에 걸리게 되었는데 스스로 가지를 들어 주었다고 한다. 기특하게 여긴 세조는 그자리에서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단다. 물론 전설이니까 그렇겠지만 절대 권력에 아부하는 것은 예나 이제나 남녀 노소가 다름 없다. 아니 자연물까지도 그렇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한 켠에는 안내판이 있고 사진이 있는데 누군가 보고 모양이 다르다고 이상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보니 많이 달랐다. 그러다가 자세히 보니 보니 [정부인송]이었다. 서원리에 있으며 정이품송과는 부부사이라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네비양의 지시에 따라 가다가 중간중간에 내가 개입하려고 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하기는 좀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갈목 터널을 지나 삼가 삼거리에서 삼가 저수지 쪽으로 직진해야 하는데 그만 한발 늦고 말았다. 좌회전이 끝나고 난 뒤 "저쪽으로 가야 하는데 까짓거 머 좀 돌아 가지요"라고 말했다. "빨리 가봐야 할 것도 없는데"라고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조금 후에 [서원리00]라는 간판이 보였다. "어 정부인송이 서원리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가 서원리야?" 그리고 조금 더 가자 정말로 정부인송이 있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려 둘러 봤다. 저 쪽에서 사진에서 본 대로 정부인송은 거의 밑둥에서부터 두 줄기였다. 부부간에 엄청 다른 나무이고 남자와 여자만큼 차이가 나는데 누군가 착각했던 것 그리고 길잡이가 조금 방심했던 것이 모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장안 삼거리 농협하나로마트에서 동생이 사주는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화령을 지나 집으로 왔다.
수제비 국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웠다. 젊은 사우는 손님이라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묵은 사우는 손님 아이지?"라고 내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매부가 맞장구를 쳤다.
"삼십년이 지났는데요"
모두들 피곤한지 일찍 잤다. 전날과는 다르게 전기 판넬을 켜지 않았다. 그 대신 매트는 내가 깔고 매부는 맨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옆사람은 은자골권역활성화센터 청소하러 갔다. 그리고 누님과 동생들도 모두 일상으로 복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