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삿날 생떼를~
제삿날 생떼를~
소소한 일상
2020-10-21 21:20:04
지방은 틀리지 않고 단숨에 썼다. 축문은 한 줄 쓰다가 틀려서 처음부터 다시 썼다. 그리고 홀기를 작성하는데 카톡카톡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열어 보니 동기들 단톡방이었다. 경주 연오랑세오녀 공원에서 산책하는 중에 찍은 단체 사진이 올라왔다. 웰빙머라고 하는 곳에서 우렁이쌈밥도 먹는 등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참깨고 들깨고 농사는 엉망인데 그곳에서만 깨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막걸리 한 병을 따서 병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그냥 퍼질러 앉아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일하다 말고 머하는 짓이냐고 옆에서 지청구가 들려 왔다. 들깨가 쌓여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빈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게 났다. 논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마른 들깨를 모으고 안아다 날라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도 몰래 탈곡기 시동을 확 꺼버렸다.
그리고 돌아보니 옆 사람은 어디가고 아부지 얼굴이 보이는데 ㅉㅉ 혀를 차시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동기들 경주서 모임하는데 나도 보내 달라고 졸랐다. 갈 땐 가더라도 가을일은 다 해 놓고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엄마가 옆에서 애원하듯 달래셨다. 손가락으로 표고를 가리키며 저거를 어쩔 거냐고 하루만 늦게 따만 패어서 못 쓴다고도 하셨다. 저렇게 따 놓은 것도 그냥 두면 무게가 줄고 색갈이 변하는데 포장해서 택배 발송하는 게 한시가 급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까짓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 농사 지가 짓게 내비두라고 아부지께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길바닥에 드러누워서 발버둥을 치는데 두 분은 본체만체 그냥 늦은목을 향해 걸어 가셨다.
"누긴가 항께 칠성이구만 왜 저캐여?"
"여행 보내 달라고 그칸대여"
"항갑 지낸기 운제 츨이 들랑고"
"저래 가이고 학조서 아들은 우째 갈구칠까"
"지가 돈 벌어 가이고 여행 보내 드리능기 도리 아잉가배?"
순간 나는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들 다 가는 제주도 여행 한번 보내 드린 적이 없다. 아니 우리 아부지는 한평생 여행이라고 가 보신 적이 없었다. 장농을 뒤져 보니 빳빳한 백원짜리 *감봉 하나가 나왔다. 이 정도면 제주도 여행은 다녀오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외여행은 나중에 동생들하고 상의해서 보내 드리리라 다짐을 하면서 고향 마을로 갔다.
집에는 아무도 안 계셨다. 잠시 마실 가셨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우선 이웃집 사람들 불러서 같이 한잔 마셨다. 우짼 일로 갑자기 왔느냐고 궁금해 하셨다. <우리 아부지 엄마 해외여행 보내 드릴라고 한다>면서 돈다발을 꺼내 흔들면서 자랑을 했다. 그런데 집안 할부지 되시는 분이 고개를 갸유뚱거리며 말씀하셨다.
"갈 수 있을랑가 모리겠다"
"왜유 이러캐 돈도 인는데"
"너 아부지 모미 안 조차나"
"간경하라 하든데"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배가 잔뜩 부었으니 며칠 몬 사실 거 같다고 하던대"
그래서 나는 헐레벌떡 대구에 있는 파티마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안 된다고 했다. 무슨 소리하느냐고 우리 아부진데 누가 말리느냐고 옥신각신 하는데 안에서 누나가 나왔다.
“누야야 아부지는?”
“야가 무신 소리하노 아부지 세상 뜨신게 운젠대”
“마자 벌써 사십년도 헐썩 지나꾸만”
눈을 떠 보니 벌써 여덟시가 지났다. 어제 저녁 둘이서 마신 음복술이 좀 과했던 탓인지 속이 메시꺼웠다. 비빔밥에 탕국으로 아침을 먹고 병풍과 젯상을 치웠다. 옆 사람이 씻은 제기들은 벌써 물기가 빠져서 다시 함에다 갈무리했다.
아버님 세상 버리신지 만44년이고 어머님 돌아가신 지 만 10년이 지났다. 오늘 새벽에 모셔야할 아버님 제사를 어제 저녁 9시에 모셨다. 그놈의 코로나 탓으로 이번에도 북 치고 장구 치고 둘이서 다했다. 부모님께서도 자손들 안전을 제일 중하게 여기실 것이니 아예 오지도 말라고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음식 장만도 대폭으로 줄였다. 양만 준 것이 아니고 가짓수도 줄었다. 많이 참석할 때는 싸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먹을 사람이 없으니 많으면 감당불가다.
추석 차례에 이어 라이브 톡(카카오 톡)으로 생중계를 했다. 그때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도를 했기에 참여가 저조했다. 게다가 사위나 외손들은 각자 차례를 모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휴대용 컴퓨터로 중계를 하니 각도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는 거금(?)을 주고 셀카봉 겸 삼각대 구입을 했더니 조금 나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초저녁에 모신 덕분인지 많은 자손이 시청을 해서 고마웠다. 하지만 녹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의견이 나왔다. 사실 뭐 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꿈에도 몰랐다.
다음에는 더 잘 하겠다고 다짐을 하다가 아니리는 생각이 들었다. 자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제사를 모셔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중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일 뿐이다. 코로나가 썩 물러가고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아니 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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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봉 : 백원짜리 백장 묶은 것을 그렇게 불렀는데 최근 알고 보니 [관봉(官封)]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