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더불어

오대독자 득남기(하)

임재수 2022. 11. 4. 17:32

오대독자 득남기(하)

웃음과더불어

2019-04-01 22:39:00


사실 그의 "득남기"는 남의 안방에서 일어난 은밀한 이야기이니 자세한 내막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대충 전해 들은 1%의 사실에 적절히 살을 붙여 재구성 했음을 밝혀 둔다.

그는 <신사임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말을 가끔씩 입에 올렸다. 처음에는 그게 자랑인지 불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명색에 걸맞게 신여사가 고고하고 기품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주변에서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성(性)스러운 일도 오직 자손을 얻기 위한 성(聖)스러운 일이라는 그녀의 철학을 풍문으로 전해 듣고 모두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둘째 딸이 태어나 서너살 넘기면서부터 집안 여기저기서 노골적인 압력이 들어 왔다. 노모는 그렇다 치고 어릴 때부터 차별을 받고 자라나 억울한 마음을 품었을 법한 누나들마저 조바심을 내니 그는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로 말하면 셋 이상을 낳으면 야만인 취급을 당했고 나라에서는 주는 가족수당도 셋째부터는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기르자>라고 하던 구호가 <둘도 많다>로 바뀌던 때였다.

다 같은 자식인데 아들 딸을 차별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딸 둘을 아들 부럽지 않게 잘 키워보자고 내외가 다짐을 했다. 그런데 그 이유 중에는 차마 말로 옮기기 어려운 사정도 숨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신여사의 냉정하고도 <고고한 기품>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다 접근하면 사람을 마치 짐승 보듯 했고 어떤 때는 우는 아이 사탕 주는 듯하는 태도에 그만 질려 버렸다. 싸우고 난 뒤 국민학생이 책상위에 금을 그어 놓듯이 방안에 아니 마음 속에 선을 긋고 두어해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의 일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일찍 퇴근하니 두 딸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아이들 할머니)께서 오셔서 데리고 갔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신여사가 먼저 암시를 주었다. 전화 벨 소리가 울리고 통화를 하고 난 뒤였다. 이게 웬 일일까하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다음날에는 새벽녘에 벨소리가 울렸다. 거룩한 행사를 치르고 난 뒤에 지금까지 쌓였던 서운한(?) 감정으로 그 양반이 그만 비알밭을 매고 말았다. <천하의 신사임당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내일은 해가 서쪽으로 뜨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여사는 발끈해서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엄청난 실수임을 그가 자각하고 사과하러 갔으나 때는 늦었다. 아예 문조차 열어 주지 않았다. 그 다음날 신여사는 출근하면서 봉투 하나를 집어 던지고 갔다. 이혼장인 줄 알고 열어 봤지만 아니었다. 이런 것이 들어 있었다.

구월 십일(양력) 해시(저녁 10시)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누울 것~
구월 십이일(양력) 축시(새벽 2시)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누울 것~
어디 철학관에서 받아 온 모양이었다. 한자를 섞어 붓으로 쓴 글씨가 달필었다. 밑에는 삐뚤삐둘 연필로 보태 쓴 글씨가 보였다. 어머님 글씨임을 그는 한 눈에 알아 봤다. 전후 사정이 한눈에 들어 왔다. 문서를 주고도 못 믿어 새벽에 전화까지 하셨던 것이다. 그는 장손이 아니라 종마라는 생각에 은근히 반감이 들었다고 했다.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움직인 신여사가 고맙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일찍 들어오라고 했고 할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가서 집을 비워 주었는데도 전혀 눈치를 못챈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그날부터 아이들 앞에서는 다정했지만 둘만 있을 때는 찬바람이 불었다.

한주쯤 지난 어느날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어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내가 종마냐고 그가 항의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딱 한마디였다. 

"이놈아 나도 씨받이 노릇했다"
그래서 그 다음달에도 이틀 동안 장손의 임무를 충실히 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철학관의 택일이 신통했는지 득남을 했다. 이름을 서운(瑞雲)이라고 지었다. 호적상으로는 그랬지만 이름이 천해야 잡귀들의 시샘을 면한다고 쇠돌이라고 불렀다.

신여사가 전입온 지 몇 개월 뒤 쇠돌이의 첫돌이라고 우리를 초대했다. 친목회 차원에서 돌반지를 준비해서 우리 부서 직원들은 단체로 찾아갔다. 아주 귀한 장손이라고 차린 것도 푸짐했다. 
우모씨가 우리 부서를 대표해서 돌반지를 끼워 주며 덕담을 했다. 
"돌이의 돌이네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잘 커거라"
작년에 신여사와 같이 근무했던 저쪽 직원들도 많이 참석했다. 역시 돌반지를 들고 나선 사람이 명석씨의 친구라고 했다. 
"이놈아 생길 때 아부지 보다 내가 고생 더 많았데이. 나중에 크거등~"
한창 웃다가 보니 애들 할머니하고 큰고모 되는 분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분위기가 어색해 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양반이 나섰다.
"아, 자네가 애쓴거 잘 알지, 이 사람 입덧할 때 야간 자율학습이나 장거리 장거리 출장 대신 간거 나도 다 알아여"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살아난듯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