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고개를 넘으면 지금도 농암장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는 온갖 신기한 물건과 사람들로 넘쳐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어른들 따라 거기만 가면 신기한 구경도하고, 맛있는 것도 얻어 먹고, 먼 동네 사는 친척들 만나면 돈도 몇푼 얻게 되는 행운도 따랐다. 그래서 우리는 장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장날(5일, 10일)과 일요일이 겹치는 날은 아예 달력에 커다랗게 표시가 되었다.
“그 먼 길 뭐할라고 갈라고 해, 필요한 거 말하면 사다 줄텐데”라고 꾸중하시는 아버님의 말씀 우리 귀에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 가는 20여리가 조금도 고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날이든 추운 겨울 날이든 따라만 나서면 그냥 신이 났다. 같이 가는 어머니나 아지매들의 발걸음이 어찌 그리 느린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열 살 전후 해서는 우리 부모님 대신 장을 다녀온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가고 싶다고 워낙 조르니까 심부름 삼아 이웃집 어른들 따라 보내셨든 것 같다. 농사 지은 마늘 한 접 보자기에 싸서 시장에다 팔아 돈을 마련해서 쓰고 왔던 기억도 있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장을 따라 나서지 못했을 때는 마중을 나갔다. 점심 때 조금 지나면서 고개 위까지 친구들과 함께 올라 가서 기다리고 놀았다. 먼저 오는 장꾼들 보고 우리 엄마 안 와요 하고 물으면 “칠성이가 말을 안 들어서, 안 온다고 하던데!”라고 대답을 하는 짓궂은 어른들도 계셨다. 용케 장까지 갔던 친구가 신기한 것(소리나는 고무 풍선, 고무로 된 물총 등)을 사 가지고 오면서 무척 뻐긴 적도 있었다.
장터에서 돌아 오는 길목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장터와 우리 마을의 거의 중간 지점이었고 그 곳에서 우리 동네 사이에는 더 이상 사람 사는 집이 없었다. 어른들께서는(주로 남자들) 자주 이용을 하셨다. 그래서 밤늦게 돌아 오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는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
그 늘재 길이 확포장 공사에 들어갔고 곧 완공될 것이다. 늘재에 담긴 나의 추억과 우리 동네 주민의 애환을 잘 닮은 노천명의 시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