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더불어
숙맥
임재수
2024. 1. 19. 16:54
뭔가 어리숙하고 사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숭막[숙맥(菽麥)]이라고 했다.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농사꾼 흉내를 내려 하니 벼와 피를 구분하기가 너무 어렵다.
우리집 논을 대리 경작하던 젊은 친구가 병이 나 병원에 입원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논을 돌보게 되었다. 웃거름을 해야 한다고 비료를 사러 가려고 했는데 집사람과 통화를 하던 매부가 점촌에서 동력분무기를 가지고 와서 뿌려주고 갔다. 아마 내가 제대로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논두렁에 풀을 깎아야 한단다. 경작하던 젊은 친구가 병원에 가기 전에 예초기 손질해 놓고 갔다. 그리고 예초기를 매고 논으로 나갔다. 아 그런데 역시 아무나 할 일이 아니었다. 예초기를 다루는 솜씨도 서투르고 팔힘이 약하다 보니 예초기 칼날(사실은 나이론 끈) 위치 조절이 제대로 안 된다. 그리고 예초기를 맨 상태로는 논둑에 인접한 벼와 피가 전혀 구분이 안 되었다. 벼와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잡풀만 두어 시간 깎고 예초기 작동은 포기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낫을 들고 나섰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피와 벼가 분명히 다르다는데 내 눈에는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놓고 자세히 보면 구분이 되는데 무심코 하다 보면 자꾸 헷갈린다. 논두렁 곁에 수북히 난 것을 베기 전에 확인하고, 한 줌 베어서는 혹시 벼를 자른 것이 아닌가 확인 하고, 그러다 보니 진도가 영 안 나간다.
사실 그러고 보니 나는 관찰력이라 할까 사물을 보는 안목이 별로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생김새를 “얼굴이 길쭉하고, 코가 오뚝하고, 눈이 크고”등의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그리고 오전에는 사장님과 함께 고추를 밭에서 고추를 따 왔다. 집에서 씻을 때 덜 익은 고추가 많이 섞였다고 불평을 많이 했다. 불평만 하지 말고 혀만 차지 말고 차라리 해고하면 속이 편하련만, 해고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피와 벼가 구분이 잘 안 되는 나도 숙맥인가. 그나 저나 우리 옆집 젊은 친구 빨리 나아서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나타나야 할 텐데 (2013.8.6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