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들과 함께
동기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
2019-09-29 20:39:35
이번 모임은 여러 가지 일정이 겹쳤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천하명산 주왕산을 탐방하는 오후 일정은 아쉽지만 포기를 하고 저녁에야 합류를 했습니다. 달기 약수탕 근처 0남식당에서 백숙으로 저녁을 먹고 숙소인 대명리조트로 갔습니다. 한잔 마시면서 영양가 있고 재미마저 있는 정담이 오고갔습니다. 자정 조금 전에 여학생들은 건너가고 여섯 명이 자리를 폈습니다.
다음날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갔던 친구 박모였습니다. 조금 더 자다가 알람 소리에 일어났습니다. 일곱시에 안약을 넣고 세수를 했습니다. 김회장이 청소를 하고 이부자리를 장롱속에다 정리하는 것을 제가 말렸습니다. <그게 사람의 도리이겠지만 관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불편한 과잉친절>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덟시 조금 넘어 여학생방으로 건너가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추어탕과 집에서 준비해온 반찬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습니다. 배모는 아침 운동을 나갔다가 식사시간에 지각을 해서 혼자 먹었습니다. 이런 곳에 오면 모든 것을 남학생들이 해야하는데 미안하다고 누군가 말했고 할 것도 없는 설겆이로 시늉만 하고 말았습니다.
첫번째 목적지는 조선조 경종 원년에 축조했다는 주산지였습니다. 청송군 부동면인지 기억이 불확실했는데 주왕산면 주산지리로 주소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쪽에서 부르면 물 건너 저쪽 편에서 대답할 정도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가두어 놓은 물이라 그리 깨끗하지도 않았지만 대한민국명승(제105호)답게 아기자기한 풍취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밑둥이 물 속에 잠겨 있지만 살아 있는 왕버드나무가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물빠짐이 좋지 않으면 어떤 나무도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상식이었는데 근 삼백년을 살아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물속에서도 호흡할 수 있는 호흡근을 발달시켰다는 것이 안내판의 설명이었지만 송모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오래 사는 나무가 잘 없다는 견해였습니다. 몇백년 사는 나무가 귀하기는 하지만 <물속에 어린 나무를 새로 심어서 키우는 것(자생하는 것 포함)은 더 어렵다>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둑 근처의 바위 위에 세운 <제언공덕비>가 저수지에 가득 찬 물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목적지였던 절골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위험한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조어기 쪼금만 들어 가면 안 될까요?" 누군가 질문을 했지만 관리인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안될 줄을 뻔히 알면서 괜히 한번 응석을 부려 본것이었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서 가까이 있는 [바람 기억]이라는 곳을 찾았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 뒷쪽에 트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흐르는 계곡물과 바람을 듣고 보고 몸으로 맞으면서 카푸치노를 마시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안동으로 가는 길에 백석탄을 구경했습니다. "석탄백탄 타는 데는 연기가 펄펄 나구요"라는 민요 가사를 떠 올렸지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미인의 속살처럼 하얀 돌(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 참으로 절경이었습니다. 석영질의 모래 알갱이가 쌓여서 생긴 퇴적암(사암)이라는데 풍화작용으로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로 딿았습니다. 그런 돌이 있는 여울이라고 백석탄이라 이름지었다고 했습니다. 냇가에서 들어 온 입구 쪽을 바라보니 길 옆에 있는 정자는 울창한 나무에 가려 보일듯 말듯했습니다.
정자 오른 편에는 봇도랑에서 흘러 내리는 물길이 있었습니다. 짧지만 급한 경사라 토석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연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도랑 옆의 고수부지(?적당한 표현이 생각이 안남) 흘러 내리지 않게 돌로 쌓았는데 무너질듯말듯 그랬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는 것이지 영원한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과욕이고 자연파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주택 옆의 포장과 그리고 오른쪽의 콘크리트 봇도랑이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였습니다. 길목에 서 있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은 <배운 것 만치 영감이 따른다> 등 교훈적인 팻말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입구 옆에는 [산남의진고와실전투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산남창의진은 영천지역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였다고 합니다. 아드님(정용기)께서 먼저 의병장이 되어서 싸우시다 1907년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정환직)마저 나섰다가 체포당했고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총살 순국했다고 합니다. 의병장 역세습이라고 하는 비장한 역사에 잠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동기이자 이번 여행에 동참했던 신모의 고조부(시댁) 증조부 되시는 분이었으며 기념비의 글씨는 작고하신 시아버님 작품이라고 합니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잠시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옆의 가로수가 처음 보는 나무였는데 딸기처럼 생긴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묵계서원으로 갈 때는 차를 세우고 조금 걸었습니다. 차가 갈 만한 길이 있고 서원 옆에 주차할 곳도 충분했는데 착각이었다고 했습니다. 가는 길 옆에는 참나무가 서있고 익은 도토리가 빠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몇개 주워서 들고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누군가의 식량이라는 생각에 길섶에다 도로 던져 주었습니다. 수확하지 않은(? 포기한 듯) 호도 나무도 많았습니다. 과잉 생산으로 수확해봐야 인건비도 건지기 어렵다는 농가의 원성이 들려 오는 듯했습니다.
읍청루를 지나서 입교당 마루 앞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숙제 안한 사람 벌서면서 자신과 싸우는 곳이 극기제"라는 송모의 해석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주변에 깔아둔 자갈 위로 화초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봉숭아는 꽃이 벌써 지고 씨앗이 여물고 있었지만 맨드라미는 아직 빨깐 빛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갈틈에서 자라는 것은 잡초뿐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하지만 만휴정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이 말이, 이 비유가 엉터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자 뒤는 산이고 앞은 계곡이니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담장 바로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도랑을 가로 질러 외나무 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건너면 바로 출입문입니다. 정자 주변에도, 다리를 건너기 전 도로와 도랑 사이에도 잘 자란 소나무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정자 앞을 흐르는 도랑의 상류(왼쪽)에는 폭포가 있고 그 위에 바위를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차를 끝까지 몰고 가다가 돌릴 때 애를 좀 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눈총도 받았지 싶습니다. 변명하건대 차량 출입을 통제하는 팻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카톡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작은 팻말이 있었는데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눈쌀을 찌푸리며 손가락질 한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는 뜻을 전합니다. 도착한 그 시간 청춘 남녀가 외나무다리 위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간 후에 뽀뽀하는 장면을 찍었다고 하는데 미스터선샤인이라는 드라마의 장면을 흉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내로 들어 와서 안동찜닭으로 점심을 먹고 헤어졌습니다. 11월 중순 정기모임이 또 기다려지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