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가득채워서
소소한 일상
2022-03-29 21:08:47
오래 전에 본 사극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제목도 등장인물의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는 유능한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다 좋은데 옥에 티라고 할 점이 딱 하나 있었다. 술을 너무 좋아했다. 좋아만 한 것이 아니고 과음 끝에는 자주 사고를 쳤다. 보다 못한 임금이 불러서 은잔을 하사했다. 무한한 영광이겠지만 당부가 있었다. 하루에 그 잔으로 석잔만 마시라고 했다. 말이 좋아 당부이지 지엄한 임금의 명령이었다.
며칠은 잘 넘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어느날 긴급한 사안이 있어서 불렀더니 고주망태가 되어서 나타났다. 호통을 쳤더니 "전하가 주시는 잔으로 석잔만 마셨다"고 우겼다. 주변에서 아무도 안 믿었다. 옥신각신하다가 확인을 해보니 이양반이 잔을 망치로 살살 두드려서 키웠다. 그래서 잔의 용량이 다섯(??)배로 커졌다. 은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다.
그건 그렇고 그날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아무튼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들어가니 적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나리 적을 구워 놓았다. "누구 약 올리느냐, 술 없이 안주만 주면 최고의 고문이라"고 익살을 떨었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턱짓으로 냉장고를 가리켰다. 문을 열어보니 은자골 탁배기가 두병 들어 있었다. 딱 한잔만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갖 사온 은자골 탁배기 병을 꺼내서 들고 흔들었다. 숟가락으로 뚜껑을 서너번 두드리고 나서도 혹시나 걱정이 되어 싱크대 안에서 땄다. 다행히 넘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접(국 그릇)을 꺼내서 가득 따랐다. 거의 99% 넘치지 직전까지. 옆에서 보더니 "어이그 내가 몬 살아!"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한잔만 마시려면 어쩔 수가 없다. 전자렌지에 넣고 스위치를 두번 눌렀다. 그러면 1분이고 내가 마시기에 딱 알맞다.
잠시 후 삑삑 소리가 나기에 달려가서 문을 열고 막걸리 잔을 꺼냈다. 시아버지 밥상 든 며느리처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조심 걸었지만 찔끔찔끔 흘리고 말았다. 식탁으로 옮겨 놓고 살펴보니 옆사람은 안 보였다. 옆에 보이는 수건인지 뭔지 들고 얼른 닦은 뒤에 세탁기 안에 집어 넣었다. 완전 범죄였다. 술자리 분위기도 화기애매했다. 산다는게 별거 있더냐 욕안먹고 살면 되는 거지.
다음날인가 친구들이 모여서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 알려 주었다.
--반만 따라서 디아라?
--내사 실타 반잔을 우예 마시노? 차라리 ~
--식탁에 옹기노코 나서 가득 채우만 대자나?
--그만 안 따시자나
--결가는 가태여?
--머라카나 시방?
--반 잔하고 온 잔을 똑 같이 1분 돌리만 가치 뜨검냐?
--반잔이 배로 뚜굽지!
--그 다매 더 채우만?
--아하 그러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