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더불어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⑤

임재수 2022. 11. 4. 19:57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⑤

세상과 더불어

2021-08-29 13:43:50


[가는 말이 고와야---] 풍설을 넘어서 교사와 학생은

 

바다 저쪽에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5)

 

부산항에서 배가 떠날 때, 태어나서 자란 조선에서의 나날이 눈에 떠올랐다.

1945(소화20)년 가을, 수기야마토미상=토야마시=는 귀환선으로 24년 남짓 살았던 조선을 떠났다.

후쿠오카에서 열차를 갈아 타고 양친의 향리인 토야마에 돌아가, 구 수기와라무라의 친척댁에 신세를 졌다. 익숙하지 않은 농작업에 땀을 흘리고, 행상도 했다.

황민화 교육의 최전선에서 전쟁에 협력했다고하는 꺼림칙함과 조선의 제자들에게의 미안함에서 [두번다시 교단에 서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맹세했다.

하지만, 전후의 교원 부족의 가운데, 여러 번 교직복귀의 권유가 왔다. [난처해진 아이가 많이 있다]는 말에 설득되어, 47, 출산으로 쉬는 교원의 뒤를 이어 교단에 섰다. 가르치칠 내용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한편, 조선반도는 격동기가 이어졌다. 해방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측을 미군, 북측을 소련군이 분할 점령했다. 48년에는 한국과 북조선이 잇따라 건국되고,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귀환까지 수기야마상 일가를 도와준 대구의 달성국민학교의 제자, 김정섭상으로부터는 재회를 원하는 편지가 토야마에 도착했지만, 이윽고 조선전쟁(50~53)으로 서신불통이 되었다.

삿뽀로동계올림픽대회가 열린 72,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김소년의 소식을 알았다. 삿뽀로 주재 한국영사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부인은 수기야마상을 흠모하는 제자인 김삼화상이었다. 올림픽후, 27년만의 재회를 성취해, 3인이 함께 [봄의 냇가] [아리랑]을 노래했다. [사진1]

76, 수기야마상은 귀임한 김부부의 초대를 받아, 31년만에 [태어난 고향]인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의 김포공항에는 제자나 사범학교시대의 동창생이 마중나와 주었다.

4년여 교단에 섰던 대구에도 갔다. 버스가 도착하자, 민족의상차림의 여성이 [선생님]하고 다가왔다. 손을 맞잡았다.

환영의 연에서, 수기야마상은 황민화교육으로 여러분을 무리하게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다고 과거를 돌아보고, 사과했다. 줄곧 자책의 마음에 시달려, 말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었다. 제자들은 다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일본이나 인본인을 향한 불신감 때문인가, 출석을 거절한 제자도 있었다. [선생님이 사죄했다]고 전해 들은 모양으로, 그 후의 방한시에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사진2]

마음에 걸린채 남아 있는 제자가 있다. 달성국민학교의 4학년때 담당했던 박소득상. 졸업후 , 당시 담임들에게서 [일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고 권유 받고 [여자근로정신대에 참가하여, 토야마의 군수공장에 동원되었다.

수기야마상은 양친의 고향이 토야마라고 제자들에게 말했었다. 친숙한 지명에 손을 든 것은 아닌가 마음에 걸렸지만, 전후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93, 전 정신대원들이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한 소송 원고의 한사람으로서 박상은 일본에 왔다. 수기야마상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듣고, 후쿠오카의 지원자 집회에 달려가 인사를 했다.

[조국의 말을 봉쇄하고, 전쟁교육을 한 것을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를 계속해서 흠모해 준 박상에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공부 따위 전연 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임금은 지불해 주기 바란다. 그런 박상 등의 호소에 일본정부나 기업은 응하지 않고, 사법도 추인했다.

분함이 풀리지 않은 채, 박상은 이미 타계했다. 제자에게 힘이 될 수 없었다고 하는 후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소설의 상을 받은 제자도 있다. 그림일기를 수기야마선생님에게서 칭찬받은 덕분에 작가를 지망했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은 잊고 있었다. 교사의 말이 소중함을 깨달았다.

전후, 토야마에서 약27년간 소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퇴직후, 현내의 민간단체인 일한교류사업에 참가해, 몇번이고 방한했다. 환갑을 지나서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에 좋아하는 격언이 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서로에게 이해심 있는 말을 하면, 뒤틀린 일한 관계도 풀리겠지요.

수기야마 선생으로부터의 전언이다.(나카노코우)[사진3]

 

전후보상 일한은 1965년의 국교정상화로 청구권협정을 체결. 일본정부는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하는 입장이다. 한편, 한국대법원(최고재) 2018, 전 징용공등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해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하여, 외교문제가 되고 있다.

 

[사진1]1976, 31년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제자들이 열었던 환영연에 한복을 입고 참가한 수기야마상(오른쪽에서 두사람째)=수기야마상 제공

[사진2]197631년만에 대구의 달성초등학교(-국민학교)를 제자들과 방문한 수기야마상(전열왼쪽에서 3인째)=수기야마상 제공

[사진3]한국의 제자에게서 온 선물을 손에 쥔 수기야마상=2-18, 토야마시, 나카노코우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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