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합지졸
웃음과더불어
2018-08-24 00:12:03
우리에게 오합지졸이란 이름을 처음 붙여 준 사람은 우리를 가장 증오했던 김철상병이었다.
주특기 104로 기관총사병이었던 다섯 사람 중 가장 선임인 민형은 나보다 4주 먼저 입대했다. 나와 같이 입대하여 신병훈련도 같은 소대에서 받았던 김모가 있었으며 신모와 서모는 우리보다 3주 늦은 군번이었다. 하나회처럼 사조직을 결성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입대 시기도 비슷하고 생각하는 면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의기투합했고 서로 의지하면서 혹독한 현실을 이겨냈던 것이다.
자대 그러니까 3중대 화기소대 전입하고 며칠 뒤 김상병은 우리를 보고 소위 “찍혔다”는 말을 했다. 고참보다 삼개월 먼저 제대하는 우리에게는 용서 받지 못할 원죄가 있었으리라 짐작을 한다. 신병교육대에서 잠시 만났던 기간병은 “자대 가거든 <문교부혜택>은 입에도 담지 마라”고 자신의 경험이 담긴 당부를 했었다. 우리는 그 말을 명심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중대 행정반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를 파악한 그의 표정을 “분노와 허탈”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를 향한 김상병의 질시와 탄압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받은 “교육”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한 달에 두어 번은 은밀한 구석에서 다섯명 모두 “집합”해서 교육을 받곤 했었다. 가끔씩 얻어맞기도 했지만 못 견딜 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 악명 높은 <줄빠따>라는 것이 없어지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교활하고 이기적이었지 그렇게 심한 독종은 못 되는 사람이었다. 때려도 후환이 없을 정도였고 그 대신 지루할 정도의 설교가 반드시 이어졌다. 그럴 때는 온갖 지식을 동원하고 미사여구를 구사했다. 그런데 가끔씩 엉터리 지식과 상황에 맞지 않는 고사성어가 등장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김상병이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던 같다. 그것은 ‘위아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소대 안의 다른 고참들을 그렇게 상대한 적은 절대로 없었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도 나름의 위계질서라는 게 분명히 존재했다. 3주 또는 4주 차이가 났으니 존대말을 확실하게 썼고 시키는 일을 거부하거나 이의를 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말하는 “고참이 까라면 무조건 까는”수준의 긴장된 질서가 없었던 면도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일반사회에서처럼 합리적으로 지시하고 복종하는 정도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민형의 인품과 능력 덕분이었다는 것이 지금의 판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김상병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고 <당나라 군대>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지는 빼고 우리끼리만 놀았으니까.
오합지졸이란 말을 들은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군대에서 상급자들이 질책할 때 가끔 쓰는 말이라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예민하게 반응해봐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전입 5~6개월쯤 지난 어느 날 김상병의 집합 교육을 받고 난 뒤 신모가 말했다.
“오합지졸이란 말 제대로 알고 쓰는 거 맞을까요?”
“먼 말?”
“그러니까 우리보고 그카니까 말입니다”
“미우니까 그보다 더한 말도 할 수 있지”
“그런 기 아이고요. 다섯명이랑걸 자주 강조하니까요”
“그런 거 같기도 하군”
그렇다고 하늘 같은 고참 보고 그 말 뜻을 제대로 아느냐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민형이 첫 휴가를 떠나고 난 뒤였다. 그날 우리는 넷이 사역병을 나갔다. 교육훈련이 없는 공휴일 오후였기에 사역은 당연히 신참인 우리 넷의 몫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PX에서 막걸리도 사서 마셨다. 다른 소대 사역병도 대부분 우리 또래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상급자들 흉도 보면서 마시고 일을 했다. 사역이 끝나고 내무반에 들어 갈 때 입에서 술 냄새가 좀 났던 모양이다. “쫄병들의 아0리에서 술냄새가 난다. 군기가 빠졌다.”고 고참인 이병장이 한 마디 내 질렀다. 그러자 화가 난 김상병이 우리를 집합시켰고 그의 동기인 김목상병도 따라 나왔다. 평소에는 잘 나서지 않았지만 위에서 질책을 했으니 그냥 있을 수 없었으리라. 김목이 조금 떨어져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가운데 김철은 우리를 엎어 놓고 서너방씩 갈기고 나서 특유의 기나긴 설교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합지졸”이란 말이 다시 나왔다. 그러자 막내 서모가 막걸리 힘을 빌려 한마디 했다.
“저 김상병님 오늘은 네명인디유”
“이새0 민00 돌아오만 다섯 그러니까 오자나, 대학 안 나와도 그건 알아여~”
여기저기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에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네 명이 모두 참으려고 발버둥치면서 터뜨리는 묘한 웃음 소리에 김철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전부 대00 박아~”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몽둥이로 먼저 서모의 엉덩이를 갈겼다. 몽둥이는 한방에 두 동강이 나고 서모는 옆으로 딩굴었다. 평소에는 후환이 없을 정도로만 치던 ‘기술자’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울분을 참지 못해 식식거리며 내무반으로 들어간 김철은 야전삽을 들고 뛰어 나왔다. 조금 멀리서 지켜만 보던 김목이 말리고 나섰다.
“야 김상병 참아라!”
“놔 오늘 저00들 직이뿌고 말뚝 박는다”
두 김상병이 말리고 뿌리치고 한창 옥신각신 하는데 내무반에서 이병장이 나왔다. 김철이 날뛰는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상황을 파악했으리라. 이병장의 위력과 동기인 김상병의 만류로 그날의 상황은 끝이 났다. 며칠 뒤에 우리는 이병장이 지켜보는 중에 김철로부터 서너대씩 얻어 맞았다. 그리고 서모는 김목으로부터 고참을 희롱한 고약한 놈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몇대 더 맞았다.
며칠 뒤 김철은 하사관학교로 갔다. 장기복무를 지원했다고 했다. 그리고 부대 개편이 있었다. 1소대가 몽땅 새로 생긴 4대대로 빠져 나가고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서 소대간의 이동이 많았다. 나는 1소대 동기인 김모는 3소대 그리고 신모는 2소대로 이동했다. 같은 중대라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처럼 눈치 보기 바쁜 우리가 다섯만이 한자리에서 모이는 기회는 없었다.
민형이 병장을 달고 우리는 상병 말년이었을 때 같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기회가 왔다. 같은 소대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일이등병 시절이 화제로 올랐다. 사회 나가서도 서로 잊지 말자고 했다. 그러는데 최모가 끼어들었다.
“ㅎㅎ 오합지졸들이 또 뭉쳤구만”
“우리도 좀 낑가주소”
장모도 나섰다. 두 사람 모두 나보다는 삼주 빠르고 민형보다는 1주 늦다. 초기에는 소대가 다르기에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허물없이 지내던 터였다.
“이등병 시절을 화기소대에서 보낸 사람만 대여”
“에이씨, 가방끈 짜른 사람은 안 댄다 이말이네요”
“그게 아니고 다섯 사람 더 대만 안대여”
“먼말?”
“오합지졸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임 이름을 오합지졸로 정했다. 하지만 전역 이후 그 모임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허구이며 사진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혀 둡니다.

'웃음과더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모의 실체 (1) | 2022.11.04 |
---|---|
오비이락 (0) | 2022.11.04 |
전원일기_일용엄니의 착각 (0) | 2022.11.04 |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새 것이 (0) | 2022.11.04 |
스마트폰과 돋보기 (0) | 2022.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