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더불어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①

임재수 2022. 11. 4. 19:52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①

세상과 더불어

2021-08-24 10:03:29


수기야마씨는 전남영광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고 8.15 광복까지 이땅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본인입니다.  금년 7월로 백세를 맞았지만 요즘도 한국인 제자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고 합니다.  금년 8월 15일자 아사히신문에 취재기사가 실려있기에 옮겨봅니다. 평가는 하지 않고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모두 5회에 나누어 실린다고 하네요<옮기면서 드리는 말>

바다 저쪽에 
~식민지에서 가르친 선생님~(5)

 

타테야마연봉을 바라보는 토야마시 교외의 서비스 딸린 고령자주택. 여기서 사는 스기야마토미상은 7월로 만 100세의 생일을 맞았다.

 

자기방 상자에는 한국에서 온 편지 뭉치가 가득 차 있다. 일찍이 제자에게서 온 것이다. [선생님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뵙고 싶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인 문면으로 되어 있다.

 

[한국은 나에게 있어서, 고향. 제자들은 대단히 정이 깊습니다]

 

그렇게 미소를 띈 수기야마상은 1945(소화20) 8월의 패전까지 4년여,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 조선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의 교단에 섰다. 전시하의 황민화 교육. 조선의 아동들을 훌륭한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패전후는, 전쟁교육에 관계했다는 것에 자책의 마음에 시달려, 제자와의 재회를 통하여, 그 괴로움을 완화해 간다. 스기야마상이 걸었던 인생은, 전후 76년이 경과해, 전쟁을 체함한 세대가 적어지는 중, 귀중한 역사의 증언으로서 현대에 무겁게 울린다.

 

아버지 겐지로상과 엄마 사토상은 토야마현 구 스기하라무라에서 본가의 논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일본이 대한제국(당시의 국호)를 병합한 후, 아버지는 단신, 바다를 건너 조선에서 생활기반을 구축했다. 엄마는 4살 위의 오빠-마사오상을 안고 뒤를 따랐다.

 

양친은 조선반도 남서부, 전라남도 영광의 농촌을 신천지로 정하고, 과수원을 경영했다. 이윽고 21(대정10), 수기야마상이 태어났다.

 

영광에서 살았던 것은 3세 정도까지. 오빠가 소학생이 되었지만, 자택에서 걸어서 다닐수 없을 만큼 (학교가) 멀었다. 양친은 아동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의 이주를 결정하고, 과수원을 남의 손에 넘기게 되었다.

 

[태어난 고향]의 따뜻한 농촌풍경은, 과수원의 길을 따라 핀 하얀 아카시아꽃과 함께 수기야마상의 뇌리에 희미하게 떠오른다.

 

일가는 조선반도 남부에 있는 경상북도의 중심도시, 대구로 이사했다. 양친은 시 중심부인 [본정통1번지]에 모자점을 마련했다. 옥호는 토야마의 []자를 따서 [부옥모자점]으로 했다.

가게에는 2인의 조선인 청년이 입주로 일했다. 양친과도 조선어는 하지 않았고, 조선인 손님이 오면 두 사람이 응대했다. [카즈요시][이치로]라고하는 일본식의 이름으로 불렀다.

 

자택겸 점포가 있었던 번화가의 상점주는, 거의가 일본인이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고용된 입장으로, 조금 떨어진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수기야마상의 유소년기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도 일본인뿐. 조선인 아이와 놀았던 기억은 없다.

 

대구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은 모여서 생활하고, 일본풍의 가옥이 즐비한 [일본인 마을]을 형성했다. 일본인과 조선인 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거의가 제각각, 수기야마상이 다닌 소학교나 고등여학교의 동급생도 일본인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삐뚜러진 식민지]였다.

 

[병탄에 관해서는 {친한 사이니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니까, 죄악감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수기야마상은 돌아본다.

 

여학교 시대에 잘 기억나는 것은 [내지]로의 수학여행이다.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기야마상에게서, 내지는 [황홀할 정도로 동경의 땅]이었다고 한다.

 

최종학년인 5학년이 된 38(소화13),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의 [서주 함락]을 축하, 낮에는 깃발 행렬, 밤에는 제등행렬로, 누비고 다닌 다음날 아침, 어수선하게 출발했다. 부산에서 배로 시모노세키로 건너, 교토나 나라, 카마쿠라 등을 돌았다. 이동중, 차창을 통해 본 아침노을 덮인 후지산의 모습은 잊기 어려운 추억이 되었다.

 

당시의 조선에서는 여학교를 나오면, 기예 등 신부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아, 어머니도 [일하는 여성] 등 당치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기야마상은 자립하고 싶었다. 학교의 게시판에 [경성여자사범학교]의 모집 안내를 찾았다. 열정적인 교원지망은 아니었지만, 응시를 결심했다. 극심하게 반대하는 모친을 담임교사를 통해 설득했다. 교단에 서는 기로가 되었다.

 

기자가 수기야마상을 만난 이유

 

2016 8 15, 아사히신문(오오사카본사판)의 독자투고란[]의 특집 [평화와 전쟁] [{자신의 나라}순간에 지다]라는 제목으로, 수기야마상의 투고가 실렸습니다.

 

일본과 조선반도의 관계사를 취재해 온 기자는, 서울 근무중 (11~14)을 포함, 일본 지배하에서 [황민화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나, 식민지 조선에서 살고, 전후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취재를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교단에 선 분을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신속히, 수기야마상을 방문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과의 교류가 계속되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황민화교육에] 종사한 일본인은 전후 원망의 대상이 된 것은(아닌가). 그런 선입관이 있었지만, 수기야마상은 달랐습니다.

 

수기야마상 곁을 몇 번인가 방문해, 편지나 전화로 주고받기를 거듭하는 동안, 수기야마상이 제자들로부터 왜 흠모의 대상인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1945 8 15일 패전으로 [식민지라고 하는 환상](수기야마상)은 무너집니다. 조선의 아동을 훌륭한 [황국신민]으로 기르는 것이 직무라고 믿고 있었던 수기야마상은, 과거를 다시 봅니다.  30년후의 재회에서 수기야마상은 후회의 마음을 밝히고, 제자들의 신뢰는 두터워집니다.

 

한일관계가 꼬이는 중, 수기야마상의 발자취는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실마리가 되는 것은(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수기야마상이 100세를 맞은 금년 여름, 그의 반생을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나카노코우)

 

 

한국병합 : 일본은 명치기, 조선의 권익 등을 둘러싸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거쳐 1905, 대한제국(당시의 국호)을 보호국으로 하고, 통감부(초대통감-이토우히로부미)를 개설한다. 외교권박탈이나 군대해산 등 지배 권한을 단계적으로 강화, 10 8월의 합병조약으로 식민지로 만들었다.


아사히신문에 실린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