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일상

차례도안지내고

임재수 2023. 10. 7. 23:48

한나절이 되도록 얼씬거리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정말로 따분하고 지겨웠다. 본부를 사이에 두고 헬기장이 있는 정상과 아래쪽 경계지점(00씨 구역과)을 여러 차례 왕복했다. 가끔 호각을 불면서 첫돌 지난 어린애처럼 아주 느린 걸음으로 오르내렸다.

 

본부 천막 밑에 앉아서 잠시 쉬다가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뭔가 잡아채는 낌새에 눈을 떠 보니 일직사관이 눈앞에 떡 버티고 서있다. 손에는 M16소총을 들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내 것이다.

--필승 근무중 이상무!

--~라 이상무~? 보초가 총을 탈취당했으니 넌 죽었다!

--오늘이 밍월인데~

--밍월엔 적이 침투 안한다더냐? 야 임병장 똑바로 모해?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철모를 쓰고 있으니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눈을 떠 보니 천막 중앙에 세운 지주(참나무 막대)가 넘어져 있다. 바람이 불어 천막이 공중으로 떠 오르니 냄비 위를 덮친 것이었다.

 

12시가 거의 다된 시각이었다. 도시락을 열고 송편 몇개와 김밥(맨밥과 구운 김만 뭉친 것)으로 점심을 먹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라면을 끓였지만 나는 라면이 싫었다. 커피까지 끓여 마시고 난 뒤 다시 걸음마 연습을 했다.

 

정상 바로 밑에는 나만의 걸상이 있었다. 헬기장 만들고 남아서 버린 보도블럭을 내가 모아서 만든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곳에 앉아서 배호 문주란 등 트롯트 가수와 노닥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필리핀서 귀국한지 며칠 안 지난 동생이었다. 당장 내려 오라고 아버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말이었다.

 

: 좀 잘하지. 배역도 정해 놓코 대본까지 맹글아 줬잖아! 그걸 모하냐?

아부지 : 시방 누굴 탓하냐? 대본인가 홀긴가 잘 읽어 봐라. 네가 어디 한분이라도 나오는지!

: (, 그러쿠나!) 그만 종아리 걷을까요?

아부지 : 요새도 밍월에 그것도 식즌부터 나오라카는 그런 직장이 있다더냐?

: 그건 아니고요, 지가 자청했습니다.

아부지 : 일부러?

: 잘 하는기 별로 없는 사람도 낑가 주는기 고마와서요.

엄마 : 하기사, 니가 일이라카만 돌바눌로 재를 치는거야 온 동네가 다 알지.

: 험한데 안 드가고 좋은 길로 호각만 불고 댕기니까 오늘 같은 날 남들 차례 지낼 때 남머이 올라가서 체면 수습이나 한다고.

엄마 : 득고 봉깨 그러네요

아부지 : 그래?

: 한목 돌아오만 새로 한상 차리겠습니다..

아부지 : 우리한테는 부질 없는 짓이다

엄마 : 한턱 낼라카만 니 동생들 다 불러라. 그리고 누야하고 자형까지!

아부지 : 그거 좋다. 그런데 생각하는기 제법이네!

엄마 : 이거 왜 이러슈, 내가 세상을 살아도 영감보다 삼십 몇년이나 더 살았구만!

본부(쓰러진 지주대)
정상의 헬기장(김신조가 맹글었다는~)
나만의 걸상(정상 밑)
재수 대신에~
사흘뒤 종아리 맞으러(23.10.02)
이것 때문에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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