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더불어

살구소동

임재수 2022. 11. 4. 17:57

살구소동

이웃과더불어

2019-11-07 19:19:10


그날 친목회가 있어서 저녁 먹고 3차까지 갔다가 좀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혹시나 하고 전화기를 열어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모두 국민학교 동기인 동필이로부터 온 전화였다. 확인을 해 보니 동필이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갑술생이니 우리 나이로 여든 셋이었다. 열아홉에 혼인을 하시고 아들딸 남매를 얻었으나 딸은 겨우 돌을 지나서 잃었고 동필이 하나만 건졌다. 딴 살림을 차리고 밖으로만 나돌던 서방님마저 서른아홉에 보냈으니 무려 44년을 혼자 사셨던 것이다.

좀 늦은 시간이어서 자는 친구가 많다는 생각이었지만 긴급한 사안이라는 판단에 컴퓨터를 켰다. 천리안에 접속하여 동기들에게 문자를 보내니 알았다는 답신도 오고 어떤 친구는 확인 전화를 했다. 고향 마을에 사는 영식이는 들깨 모종을 하고 한잔 마시고 단잠이 들었다고 그의 아내가 대신 전화를 했다. 오늘 택배로 살구를 보냈는데 어째 이런 일이 있느냐고도 했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일어났다 앉았다 엎치락뒤치락 했더니 제발 잠 좀 자자고 옆에서 짜증을 내면서 벌떡 일어나더니 베개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영식이네 부모님께서는 말씨가 우리와 좀 달랐다. 처음 듣는 어휘도 많이 나왔고 억양이 독특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분을 두고 <재산댁> <재산양반>이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재산은 봉화군 어디였는데 광복 전에 찾아 들어온 이주민이었다. 은척면 우기리에 동학교당이 생겼고 그 신도들이 이상향을 찾아서 많이 들어왔다. 인근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팔밭(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마치 소의 뱃속처럼 외부와는 단절된 곳, 그래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하면 우복동을 찾아 왔던 것이다. 화북면에서 우복동이라는 스토리를 선점해서 홍보에 나섰지만 마을 어른들께서는 <우리 마을이 바로 우복동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가득골 바랑골 움닥골 큰터 등 우리 동네 주변에도 골골이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내가 철이 들기 전 거의 다 떠나가고 너댓 가구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두 분 모두 을축생으로 열 살 전후에 부모님 따라와서 광복이 되던 해에 혼인을 했다. 이남이녀를 얻었지만 둘째와 셋째를 연거푸 잃었다. 홍역을 앓는 아이들을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보냈다. 병의원을 찾을 수도 없었고 약 한첩 써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마을에는 침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 있었지만 산속에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영식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결국 마을로 내려왔고 이웃이 되어 함께 어울려 살게 되었다. 이때 동필네 집안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두 집안의 인연은 영식 모친이 동필네 집안으로 입적하면서 시작되었다. 장녀인 둘래가 태어나고 학교 갈 나이가 되어 혼인 신고와 출생 신고를 동시에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식이 외가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혼인한 두 사람 살림 차려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가 부모님들 모두 타처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가끔 찾아 왔지만 전란을 겪으면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제대로 찾으면 찾을 수야 없었을까마는 급한 대로 동필이 조부모의 딸이 되는 절차를 밟은 것이 전쟁이 끝난 다음해였다.

 

그리고 영식이 누나인 둘래는 입학을 하기는 했지만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았다. 우리 마을에서도 30분 이상 걸리는 산속 길을 혼자서 걸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4학년 마치고 끝이었다. 5학년 과정부터는 면소재지에 본교에 다녀야만 했는데 우리 마을에서도 두 시간 정도 걸어가야만 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기에 초등학교 문턱도 넘어 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었고 그 중에서 반 정도만이 본교로 진급 아니 어쩌면 진학을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둘래는 혼례를 치루었다. 담을 맞대고 있었던 우리 집에서 건장하게 생긴 낮선 청년들 셋이 말을 지었다. 새신랑을 태우니 가을 운동회 때 기마전하던 그 모습이었다. 떠들썩하게 함성을 지르며 동네를 한 바퀴 돌더니 초례청을 차린 영식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청년 두어 명과 동네 꼬맹이들이 줄을 지어 뒤를 따라 갔다. 영식이네 집에는 채알(차일)을 치고 그 아래에는 멍석을 깔아 놓았다. 가운데에는 다리가 긴 상을 차려 놓았고 그 위에는 각각 소나무와 대나무가 꼽힌 큰 병 두 개를 올려놓았다. 닭도 한 마리 얹어 두었는데 예쁜 보자기로 머리가 나오게 쌌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면서 주변을 둘레둘레 살피고 있었다. 상 양쪽에는 멍석 위에 다시 초석자리를 깔아 놓았다. 새신랑이 그 위로 올라서는 순간 몸이 기우뚱 했지만 옆에 있던 친구들이 잡아 주어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웃음이 터져 나왔고 함께 왔던 청년들이 돗자리 밑에서 한뼘 쯤 되는 수수깡 몇 개를 꺼냈다.

 

신부가 먼저 절하고 신랑이 나중에 절을 한 것 같았다. 제사 때처럼 신부가 술잔을 들면 주변에서 술을 따르고 옆 사람이 받아서 상 건너 쪽에 있는 신랑에게 전달했다. 다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술잔이 오고 갔다. 신부는 마시는 척하다 말았고 신랑은 다 마셨다. 그 청년들이 종이로 포장한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신랑이 옆으로 비켜서고 그 자리에서 맞은 편 신부에게 전달했다. 받으려고 하면 도로 빼앗고 다시 내밀고 신부 약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돗자리 밑에 수숫대를 넣어 신랑을 놀렸고 신랑 친구들이 신부를 상대로 약을 올리니 장군멍군인 셈이었다. 혼례가 끝나자 영식이 누나는 훌쩍훌쩍 울면서 가마를 탔고 영식이 어머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한입 머금더니 가마 위로 뿜었다. 나를 비롯한 동네 꼬맹이들은 가마 뒤를 한참 따라갔다. 이웃 마을 불무골을 지나 동네시리 쯤에서 가마가 잠시 멈춰 섰다. 고개를 넘어 여골까지 가야 했기에 조꾼(교꾼)들이 쉬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 꼬맹이들은 거기서 다시 마을로 돌아 왔다.

 

문서상의 친정이고 처가였지만 영식이 부모는 동필네 집으로 자주 인사를 왔다. 산토끼나 노루 등의 산짐승을 잡아서 오기도 했고 송이나 능이 등의 버섯을 따서도 다녀갔다. 부지런하고 인정 많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동필네 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집안 어른들과 상의한 끝에 바랑골에 있는 문중밭을 맡겼다. 워낙 멀어서 지금은 그 밭 산이 된지 오래지만 오백 평이 조금 넘었다. 그 근처에 있는 동필네 산소 두 상부 금초를 하고 시사를 차리는 조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그저 먹기라고들 했다. 농사가 바쁠 때에는 바랑골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지만 내가 기억하기에는 대부분 이웃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영식이는 동필네 집에서 받았던 그 은혜가 어쩐지 못마땅했다고 훗날 털어 놓았다. 세상에 인심 그만한 집 없다고 부모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는데 그 말이 영 듣기 싫었다. 결정적으로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은 동필네 시사때였다. 며칠 전부터 디딜방아 찧어서 떡을 하고 전을 붙이고 준비를 해서 당일은 영식이 아버지가 지게에 잔뜩 지고 산소로 올라 가셨다. 어린 영식이도 돗자리 등을 들고 따라 나섰다. 그 때 영식이는 문중 어른들 앞에서 손을 비비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설움이 치솟았지만 속으로 눈물만 삼켰다. 다른 동네서 온 동필이 친척들 중 비슷한 또래의 사내 하나가 영식이를 무시했다. 시사를 지내고 난 뒤 같이 섞여서 음식을 먹으면서 놀고 있었는데  0 0씨도 아니자나 왜 와써라고 했다. 자존심이 상한 영식이가 들고 있던 과일인지 과자를 내던지고 산을 내려갔다. 동필이가 따라가면서 달랬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옆에서 재촉을 하는 소리에 일어나서 허둥지둥 출근했다. 방과후 수업을 아침에 들어갔다. 불평하는 아이들을 달래고 수업을 진행하는데 담임 교사가 들어오시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셨다. 교실문을 열고 대충 사정을 설명하고 수업을 계속했다. 다섯 시쯤 가리점에 도착했다. 영식이 어머니께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동필이 모친이 돌아가셔서 서울로 문상 간다고 대답을 했더니 내가 믄저 주거아 하는긴데 씰데 읍시 오래 사라 요기다고 하시면 눈물을 훔치셨다. 한참 있다가 저 살구 좀 따가 동필네 엄마 한테 갖다 드리만 조을낀데라고 한탄하셨다. “동필네 모친 돌아 가셔서 문상 간다고 재차 말씀 드리는데 영식이가 끔벅끔벅 눈짓을 해서 그냥 차를 탔다. 영식이 아내도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 한다고 동승해서 서울로 출발했다. 늘재에 오를 때는 꼬불고불 굽이가 심한데 농암쪽으로는 길이 시원스레 뚫렸다. 확장을 해서 가포장만 한 상태이지만 통행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어린 시절 어른들 따라서 농암장에 가던 이야기가 나왔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였지만 가는 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고 가보고 싶어 안달을 하던 곳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별게 아니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장이 서는 날은 미리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 놓고 기다렸다. 4학년 때 단체로 영화 구경 갔던 이야기도 나왔다. 극장 안에서 기다리며 준비해 갔던 도시락을 먹었다.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도 불렀다. 다른 손님들도 영화를 함께 봤는지도 모르겠고 내용도 기억에 남은 것이 전혀 없다. 돌아오다가 솔밭 근처에서 그쪽 아이들과 시비가 붙었다. 육학년 중 우리 동네 억식이하고 불무골 사는 꼬마가 용감하게 나섰다. 칠구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모두들 꼬마라고 불렀고 동생인 성구마저 <꼬마시아>라고 불렀다. 주먹다짐이 오고가기 직전에 선생님들께서 나타나셨고 싸움은 싱겁게 끝이 났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코흘리게 육학년이겠지만 두 살이나 어린 우리들에게 두 선배들의 태도가 너무나도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그 무용담은 두고두고 우리들 입에 오르내렸다.

 

삼년 동안 이 길을 걸어 댕기느라 동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잠자코 운전하는 영식이 보고 내가 한마디 했다. 영식이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영식이도 은척까지 걸어 다녔다는 생각이 났다.

아참 친구가 다닌 은척이 여개보다 좀 더 멀었지

영식이가 힐끔 쳐다보며 대답을 했다.

하긴 자네도 눈이 와서 가은까지 걸은 적이 있다고 들었네만! 우리 같으만 학교 안 가도 대는 좋은 핑계 거린데 친구는 악바리 같이~”

겨울 방학 끝나던 날도 그랬고 눈이 많이 와서 가은까지 걸어 가서 기차 탄 일이 몇 번 있었네. 악바리는 말도 안 되고 그냥 겁쟁이였어! 학교 하루 안 가만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걸랑

농암까지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가은 마성을 지나 문경읍에서 고속도로로 진입을 했다.

 

우리가 철이 들 무렵 동필이 아버지께서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깨끗하게 차려 입고 바깥나들이를 자주 하셨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작은 부인을 얻어 딴 살림을 차렸다고 어른들이 모이면 쑥덕쑥덕 입방아를 찧었다. 그때부터 영식이 아버지가 동필네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가 우리가 사학년이 되던 해부터는 동필네 논밭 전체를 대신 경작했다. 동필네 몫과 영식이네 몫으로 나누어서 지었다고 했다. 자기네 몫인 논에 모를 심던 날 기분 좋게 취한 영식이 아버지께서는 점심 먹으러 오라고 가까운 이웃을 찾아다니며 당부를 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때는 남정네가 이웃집 일을 하러 가면 처자식도 함께 가서 새참이나 점심을 얻어먹었던 시절이었다.

 

6학년때 수학여행을 갔다. 아니 5학년도 함께 갔다. 가정 형편상 못 가는 사람이 많았으니 두 학년 합해도 서른 명이 채 안 되었다. 늘재를 넘고 감막을 지나 한우물 냇가에 당도하니 돌다리가 물에 잠겨 건널 수 없었다. 밤소쪽에 다리를 놓았으니 그리로 가면 된다고 누군가 알려 주었다. 조금 돌아가니 다리가 있어서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개구쟁이들이 다리 중간에서 구르면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는데 덜렁다리라고 불렀다. 잠시 동안 수학여행 못가는 줄 알고 무척 가슴을 졸였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들 그랬다고 했다. 농암에서 아이노리라고도 하고 합승이라고도 불렀던 소형버스에 선생님 두 분에 학부모까지 다 탔다. 가은역 앞에서 내려 다시 기차로 갈아탔다. 가은인가 불정에서 탄광도 보고 신기에서 무척 신기한 시멘트 공장도 견학했다. 그리고 점촌에서 극장 구경도 하고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 그냥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저녁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선생님 몰래 숙소를 빠져나갔던 학구가 허둥지둥 울상이 되어서 나타났다. 동네 아이들에게 동필이가 잡혀 있다고 했다. 영식이가 따라 나섰다. 나는 은근히 겁이 났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따라 나설 채비를 하는데 영식이가 귓속말로 선생님 아시면 곤란하니 그냥 남아서 적당히 둘러대라고 말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기다리는데 식당집 주인이 선생님을 찾았다. 전화를 받으신 선생님께서 요놈의 자석들 내 가만 두나 봐라~”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셨다. 잠시 후에 선생님께서 친구 세 명을 압송해 오셨다. 영식이 얼굴은 코피를 흘린 흔적이 남아 있었고 입술도 좀 터진 것 같았다. 나도 감독제대로 안 한 죄로 불려가서 네 명이 함께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께서 일장 훈시를 하시다가 영식이 귀를 잡고 코피 자국을 보시더니 어린 기 참 대단하구만!”라고 말씀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그러자 다른 선생님께서 장차 크게 될 놈이여라고 하셨다. 동필이가 주머니에 들었던 돈을 탈탈 털어서 바치자 그 돈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둘 중 하나를 향해 영식이가 돌격했다. 그들 중 나머지 한명도 나섰고 이쪽에도 학구와 동필이도 합세했다. 이쪽이 한명 많았지만 만만치 않았다. 한두 살 더 먹었고 뒷골목을 설치고 다니는 아이들을 상대로 숫적인 우세가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앞섰던 영식이가 몇 대 맞고 함께 주먹을 내 질렀을 때 호각소리가 나고 파출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동필이 아버지가 작은 부인을 얻었다는 소문은 결국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청주에서 살았지만 아들까지 태어나자 삼십 여리 밖의 화령으로 옮겨 왔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지만 동필이 어머니는 애써 태연한 척했고 동필이 할머니가 찾아 갔다. 달래도 보고 으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죽은 영감까지 원망했다. 동필이 숙부가 동필이 할머니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결국은 큰아들을 닥달해서 논 닷 마기하고 작은 밭 한때기를 작은아들(동필이 숙부) 앞으로 이전해 주었다.

 

그해 겨울 그러니까 69 2월 초 또 하나의 소동이 있었다. 아들이 며칠 째 들어오지 않자 동필이 할머니가 넋두리를 했고 동필이는 영식이와 상의한 후에 나까지 합세하여 셋이서 찾아 갔다. 꽤 먼 거리였지만 영식이가 길을 잘 알았다. 시집간 누나가 여골 살았기에 거기 갔다가 화령장 구경을 갔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찾아낸 후 처음에는 눈덩이를 담 너머로 던졌다. 반응이 없자 약이 오른 우리는 돌을 던졌다. 장독인지 뭔지 깨지는 소리를 듣고 도망을 쳤다. 돌아오다가 영식이 누나 집으로 들어갔다. 어린 것들이 찾아오자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거기서 하룻밤 자고 마을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같이 자는 동안 마음이 변했고 그 다음날 또 다시 찾아 갔다. 그러다 그만 그 동네 청년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세 명 모두 그 여자네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우리가 사는 집과는 다르게 모든 게 깔끔했다. 그리고 추측과는 다르게 동필이 아버지는 거기 안 계셨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먹을 것을 내 왔다. 생천 처음 보는 것들이라 나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 갔지만 동필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권해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자 그 여자는 한숨만 쉬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러다가 동수야 이리 온하고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자 어린 사내 아이가 나타났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거기에는 서너 살 먹은 또 하나의 동필이가 서 있었다. “동수야 니 헝아다그 여자는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필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입가가 실룩실룩 하더니 벌떡 일어섰고 우리도 따라 일어섰다.

 

시거리 송계국민학교 옆을 지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여골로 넘어 가는 고개 위를 지나면서 훌쩍훌쩍 동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필이를 달래면서 길을 재촉했다. 여골서 점심을 먹을 때 나타난 영식이 자형께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추궁을 하셨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토를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식이네 자형께서도 그냥 한숨만 쉬셨다. 영식이 누나를 통해서 우리의 무용담을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어린 우리들을 불러 들여 맛있는 것을 차려 냈다는 것을 두고 <여시 같은 년> <아주 고단수>라는 말들이 나왔다. 동수를 불러내서 대면시킨 것을 두고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작정> <나름대로 공존을 노리는 것>이라고도 했다.

 

<동수를 보는 순간 맥이 탁 풀렸고 그 여자에 대한 증오심이 이상한 감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엄마의 얼굴을 보기기 죄송스러웠고 배신자가 된 듯한 죄책감에 한동안 시달렸다.>고 동필이는 훗날 털어 놓았다. 그리고 영식이도 <맨날 은혜만 입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마음의 벽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고민을 털어놓고 부탁을 하는 동필이가 고맙더라. 그리고 동필이를 위해 나서게 되면서 마음의 벽이 무너졌다>고 언젠가 말했다.

 

그리고 삼월이 되자 나는 두 친구와 조금 멀어졌다. 동필이는 농암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고 영식이는 은척에 있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녔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고향 마을과 부모님 슬하를 떠나서 생활했다.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을 찾아 갔고 방학 중에는 집에서 생활했지만 함께 어울릴 기회나 공유할 추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 두 친구가 김천까지 찾아 온 적이 있었다. 토요일 저녁을 평화동에 있는 내 자취방에서 함께 자고 아침에 직지사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직지사 정류장에서 내렸다. 매표소 앞에 서 계시던 학생과 선생님께서 손가락을 까닥까닥 나를 부르셨다. 내가 사복을 입었으면 알아보실 수 없었겠지만 그때는 교복 외에는 외출복이 없었다. 귀를 잡아 당기시며 공부나 하지 뭐 하러 쏘댕기느냐고 하셨다. 입장권도 끊지 않고 그냥 자취방으로 와서 점심 해 먹고 둘은 떠나갔다.

 

그런데 우리의 돌팔매질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다음해 말쯤 그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떠나갔다. 동필이 아버지도 겉으로는 별무반응이었지만 기가 좀 죽은 것 같았다. 몇 달간 두문불출하더니 다시 나들이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이태 뒤 다시 말하면 1972년 가을에 돌아가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빚쟁이들이 나타났고 동필 숙부 몫의 논과 작은 밭만 남고 나머지 재산은 다 넘어 갔다. 그때 동필 숙부가 나타나서 자기 몫의 작은 밭을 팔아서 집과 터를 찾았다. 동필이 할머니의 결단이 보통이 아니라고 동네 사람들은 혀를 내 둘렀다. 하지만 동필이 할머니도 이년 뒤엔가 별세하셨다.

 

둘이서 가출한 것은 동필이가 3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 영식이는 고등공민학교 졸업하고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두어해 전부터 시작한 담배농사로 인해 마을에 생기가 조금씩 돌던 시기였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에 하루 종일 지게로 담배를 져 날라야 했으니 무척 힘이 들었다. 잎담배를 엮어서 건조실에 달아매고 나면 열시 넘을 때가 많았다. 찰흙을 파다가 분탄과 반죽해서 불을 때자면 밤잠을 설쳐야 했다. 너무 곤한 나머지 자다가 시간을 놓치면 불이 꺼졌다. 그러면 건조실 내부의 온도가 떨어지고 습기가 차면서 마르던 담뱃잎에서 물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힘든 만큼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영식이의 말이었다. 동필이는 읍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망과 빚쟁이들에게 재산이 넘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서울에서 중국집 철가방 들고 배달도 했고 공장 생활도 했는데 두어 달 지나자 각자 헤어졌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 때 동필이는 집으로 돌아 왔고 이듬해 고등학교 남은 일년을 다시 다니고 나보다 한해 늦게 졸업을 했다.

 

그 무렵 고향을 찾았을 때 동필네 집에는 동수가 와 있었다. 열 살 된 어린 자식을 맡기고 그 여자는 제 갈 길을 갔다고 했다. <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남자 죄가 더 많다> <그 여자도 피해자일 뿐>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고향 갈 때 가끔 보이던 동수가 어느 해부터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하고는 타처로 나갔다고 했다. 그래도 형제간이라고 동필이와는 가끔 만난다는 풍문이었다. <처음에는 엄마 눈치를 좀 살폈는데 나중에는 뻔뻔해지더라. 생각해 보니 내가 참 간사하더라>는 것이 동필이의 말이었다.

 

동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취직을 했다가 입대를 했다. 나는 좀 늦게 80년에 입대하여 복무하는 동안 한 해 차이로 둘은 혼인을 했다. 그리고 영식이 부친도 별세를 했다. 그 후에 나도 전역을 했지만 바쁘게 사느라고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2년말 대선 무렵에 동기회가 성사되었다. 서른 명 조금 안 되는 졸업생 중 열여덟 명이 사벌 경천대유원지에서 만났다. 소문대로 많이 벌었는지 영식이가 지갑을 많이 열었다.

 

2006년인가 동필이 모친이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거동이 불편해서 혼자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동필이와 그 숙부를 만나서 영식이가 집과 터와 닷 마지기 논을 매입했다. 묘하게도 영식이네 아버지께서 경작하시던 논이었다. 시세보다 많이 줘서 값만 올려놓았다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평이 많았다. 하지만 <천냥을 주고 집을 샀는데 백냥은 집값이고 구백냥으로 이웃을 샀다>는 고사만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동필이 숙부는 자기 몫의 토지를 팔아서 조카가 형수(어머니)모시고 살 큰집을 마련하는데 많이 보탰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필이 모친은 서울로 떠나갔고 이태 후 영식은 귀향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스름 달빛이 비치는 여름날 밤이었다. 대문 아니 삽짝을 통과하여 살구나무 밑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나와 영식이 그리고 불무골 사는 학구 셋이었다. 그날 동필이가 살구를 학교로 조금 가져가서 자랑을 했는데 학구는 얻어먹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우리는 학구의 꼬임에 빠져 동필네 집으로 잠입을 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으려고 했는데 학구는 기어이 나무로 기어 올라갔다. 셔츠 앞자락에 가득 담아서 마당을 지나서 나오다가 동필이 숙부와 마주쳤다. 우리보다 대여섯 살 많았는데 농암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었다. 그가 놀란 나머지 고함을 질렀다. “~누구여~” 우리는 뒷걸음질 치다가 같이 뛰었다. 나는 그만 익은 살구를 밟아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후래시를 들고 가까이 다가 와서 얼굴을 비추어 보더니 말했다. “달라고 하면 줄낀데 안 다친나?” 그런데 갑자기 뒤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아야!”“사람 죽어요!” 놀란 어른들이 등불을 들고 나왔다. 뒤안으로 달려가 누워서 뒹구는 친구 둘을 데리고 나왔다. 도망간다는 것이 벌통 쪽으로 접근했던 모양이었다. 마루에 눕혀 놓고 된장을 가져오라고 했고 누군가 마구간 뒤의 오양물(소의 오줌)을 발라야 한다고도 말했다. 다음날 둘은 얼굴이 퉁퉁 부어서 등교를 했다. 친구들이 손가락질하고 놀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니 동필네 집에서 보낸 살구가 한 바가지 있었다. 영식이네 집에도 가져 왔다고 했다. 중학교 들어가서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해마다 얻어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천지개벽이라도 할 듯이 호들갑을 떨었던 새천년이 찾아 왔고 그해도 저물어 가던 초겨울 마을회관 준공식이 있어서 고향을 찾았다. 여러 사람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화제가 그 때로 옮겨 갔다.

종아리 맞을 개구장이들한테 살구꺼정 보내시고~”우리 엄마가 말씀하시자

그래요 머가 이뿌다고~”영식이 엄마도 맞장구를 치셨다.

츨읍는 것들이 얼매나 먹고 싶었겠어요! 진작에 농가 주지 않았다고 어머님한테 꾸중도 들었어요라고 동필이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살구나무의 내력까지 나왔다.

그 나무는 동필이 아버지가 태어나던 해에 동필이 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 그리고 임진년에 헌집을 뜯고 새집을 지었다. 아들이 장성한데 며느리 보자면 집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살구나무를 베어 내려고 하는 것을 동필이 할머니께서 말리셨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심었으니 어쩐지 운명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동필이 어머니께서 시집 왔을 때도 거기 서 있었는데 제법 키가 크고 열매가 많이 달렸다. 요즘 개량종에 비교하면 알이 형편없이 잘았다. 하지만 약을 치지 않아도 별다른 관리가 없어도 벌레가 생기지 않았고 맛이 좋았다.

 

좀 쉬었다 가자고 깨워서 눈을 떠 보니 여주 후게소였다. 고급 커피를 한잔 사려고 했는데 영식이가 기어이 자판기를 찾아냈다. 싸구려 입맛이라 음식 만드는데 부담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영식이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한잔씩 뽑아 들고 마주 앉았다. 새벽에 있었던 이스탄불 공항의 폭탄 테러 관련 소식을 텔레비전에서 보도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아이구 끔찍해라!”
저런 것들은 잡아서 능지처참을 해야 하는데
극형만이 능사는 아니지
맞아요 악만 남은 사람들이니까요

옆자리에 앉은 다른 일행들이 열을 올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도 살구 보냈다며?”
영식이를 쳐다 보며 내가 말을 건냈다. 영식이 대신 영식이 아내가 대답했다.

벌써 세 번째 보냈어요!”

요새 그런 걸 누가 먹는다고!”내가 말했다.

허허 말도 마! 이사 와서 살구나무 비 낼라고 했지. 머글 사람도 읍는 살구 여개저개 빠징께 지저분하기도 하고 그늘도 지자나. 그런데 인정머리 읍다고 엄청 욕머겄어. 살구나무 심은 내력도 들었고 해마다 어릴 때 살구 어더 머근 이야기도 나왔지, 그래도 처음엔 쌀 한포 보내만 잘했다 카시더니 재작년부터 살구를 보내야 한다고 우기시니 우짜게써.”

살구나무의 내력은 동필이 엄마한테 나도 들었으니 노인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쌀도 보냈다는 말에 가슴이 찡해서 다시 물었다.

아니 쌀도 보냈어?”

그까짓 쌀 한포 얼매나 한다고

하기사 요즘은 제일 싼게 쌀이지만 그 정성이 눈물 난다. 그런데 오늘 말씀하시는 거 보니 모친께서 쪼매 이상하시던데

그러신지 쫌 댄네동필이가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고 다시 내가 물었다.

옌날 생각이 나서 그러시는 모양이지만 살구만 달랑 보내기는 좀 그러차나?”

당연하지요 가지나 오이 풋고추 등으로 채워서 보내요, 살구 이야기는 저도 들었구만요

영식이 아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옌날 기억은 잘 하시고 금방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하만 치매 초기라고 하던데 아무튼 제수씨께서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내가 차를 몰았다.

 

아홉시쯤 장례식장에 도착하였다. 갑자기 어쩐 일이냐고 빈소를 뵙고 난 뒤에 물었다. 유월 중순인가 소변을 흘려서 버린 속옷을 혼자서 빨다가 며느리한테 들켰다고 했다. 그때부터 곡기를 끊었고 집안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며느리가 빌고 아들이 달래고 손자 손녀가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끝내는 시동생과 동필이 이모까지 나섰지만 고집을 꺾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제가 그냥 모르는 척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동필이 처가 울먹였지만 질부는 죄가 없다 그동안 병수발하니라고 애썼다고 하면서 동필이 숙부가 위로를 했다. 그 여자의 아들 그러니까 동필이의 배다른 동생인 동수도 함께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밤 늦게 그 여자가 나타났다. 50년 가까운 세월의 흔적과 함께 옛 모습도 조금 남아 있었다. 다른 문상객들은 다 떠나고 가까운 친지들과 가족만 남아서 빈소를 지키던 시간이었다. 동필이와 숙부는 일어서서 맞이했고 동수는 외면을 했다.
우리 어매는 돌아가시고 읍당께! 무신 염치로 나타났어! 돈 좀 보내 준거 가이고 사람 도리 다 항걸로 알만 안대지!”라고 울음 섞인 한탄인지 원망인지 흘러나왔다. 동필이와 숙부가 나서서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서 한참을 달랬다. 그 여자는 빈소에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뒤에 한참 동안 울먹이다가 떠났다. 동수는 미동도 않았고 숙질이 함께 나가 배웅을 했다.

빈소 상위에는 노랗게 익은 살구가 대추를 밀어내고 앞줄 제일 왼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말없이 오늘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이웃과더불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리점마을표고  (1) 2022.11.04
표고와엄마빽  (1) 2022.11.04
동해안나들이  (1) 2022.11.04
영덕 그리고 오로정승마을  (0) 2022.11.04
공짜라도 택배비가  (0) 2022.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