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더불어

형 노릇

임재수 2024. 1. 23. 09:25
그날도 나는 00와 싸웠다. 약이 올랐다. 집으로 들어오니 마루 한 편에 청넘어 밭에서 따온 홍시가 대래끼에 담겨 있었다. 가장 잘 익은 놈으로 하나 골랐다.
 
“아 맛있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면서 맛있는 척 먹었다.
“나도 하나 줘”
“싫어, 용용 애달지!”
잠시 후 그냥 저 집으로 간 줄 알았던 00가 저들 할매 손을 잡고 나타났다.
“칠성아! 네 동생 홍시 하나 줘라.”
“싫어! 00 미워”
“그럼 할매가 먹도록 한개만 다고.”
“거짓말! 00 줄라고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다래끼로 들어가는 할매 손을 막았다. 결사적으로 버티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뒤통수를 후리 쳤다. 눈에 불이 번쩍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버지의 화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못된 놈아, 할매 하나 잡수세요 하고 갖다 드려야지!”
너무나 서러워서 펑펑 울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아이구, 세 살이나 더 먹은기 어린 것하고 맨날 싸우노”
어머니께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심하다는” “실망하는” 그런 묘한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부끄럽게도 형노릇도 못하는 못난이였다.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는 싸워서 얻어 맞고 들어와서 부모님을 슬프게 만들었고, 세 살 아래의 00과 자주 싸워 부모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그 싸움은 내가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고향 집을 떠나 살면서 아마 끝이 났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때부터인가 “형”으로 그리고 결혼 후에는 “형님”으로 호칭이 바뀌고 대접도 달라졌다.
 
장성한 후 00는 고향 가까이서 살면서 객지에 사는 나와 종형님을 대신해 집안 일을 대부분 처리했다. 조상님의 제삿날도 챙기고 조상님들 산소를 돌보고 내가 잊고 있을 때 항상 먼저 연락을 해 오곤 했다. 아버님 큰아버님께서 일찍 별세하였기에 조상님들의 산소 위치도 몰랐던 나는 00을 따라 다니면서 익혔다. 그러고 보면 나는 00에게 형노릇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98년 어느날 00는 저 세상으로 갔다. 문중의 대소사를 나한테 맡겨 놓고 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나를 앞질러 갔다. 싸대기 맞던 그날의 등장 인물은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00 모두 떠났다.
 
오늘 밤에는 배차적이나 구워 놓고 00를 불러야겠다. 한잔 얼큰하게 마시고 난 할매 아부지 엄마를 찾아 뵙고는
“이만하면 형 노릇 제대로 한 거 아닙니까?”하고 자랑해 봐야지 (2014.2.19 페이스북)
※사실은 우리 할매였지만 그 때는 큰집(00네 집)에서 사셨고, 00가 우리 할매라고 우기면 경우가 있었으므로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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