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일상

술 권하는 사회

임재수 2024. 2. 14. 20:59

그 시절에는 기분 좋게 취한 적이 별로 없었다. 술이 과해도 정신은 또렷한데(나만의 착각??) 잠을 잘 수 없었다. 자려고 눕거나 눈만 감아도 평소와는 달리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깰 때까지 두 눈을 부릅 뜨고 일어나서 버텨야만 했다. 술이 과할 때는 집 근처 골목길에서 한두시간 뺑뺑이를 돌다가 들어 갔다.  "기계가 새것이라서 너무 예민해서 그렇다. 낡아서 성능이 떨어지면 정신을 잃고 퍼질러 자게 된다"는 선배 강모선생님의 이론에 그냥 피식 웃고 말았었다.

그놈의 술을 왜 마시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하나다.  단지 이놈의 세상 때문에 억지로 마신다. "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를 연상하면 틀렸다. 나라 걱정에 잠못 들어서 비분 강개하면서 마시는 우국지사는 그때도 지금도 아니다. 강권하는 술자리 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못 마시는 술 억지로라도 마셔야 분위기가 살아난단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2차3차 동행해야 단합이 된다는 해괴한 논리가 있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술을 32년 전에 끊었었다. 적당하게 마시는 것이 더 어렵다는 판단에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하나가 "마시지는 않더라도 잔이나 받아 놓고 마시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둥글둥글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회생활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하면 안 된다고 했다. 맞는 말 같아서 마시는 시늉을 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 누구 잔은 받아 놓고?" 이런 말이 나왔다. 결국 그 "척"마저 그만 두고 말았다.

임모는 술을 안 마신다고 포기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제일 힘들었던 것이 한마을에서 자란 고향 친구들 계모임이었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다 보니 술을 끊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음에 만나면  억지로 또 권했다. "술잔 거절한다고 상급자가 소주 한잔을 내 머리위에 들이 붓더라. 독하게 마음 먹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참았지. 그날 분위기는 그걸로 얼어 붙었어. 다음날 그 양반은 사과했지만 나는 도리어 고맙더라고. 그 사건을 계기로 억지로 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부러워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독하게 끊었던 술을 14년 전에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기계가 낡아서 그런지 적당하게 마시고 기분좋게 취하는 경우가 많다. 그시절에 없던 일이다.  옆사람이 별식을 만들면 안주로 보이기 시작했다. 술꾼이 좋아한다는 <은자골 탁배기>가 좋고 특별한 맛을 보탠 다른 막걸리는 싫다. 하지만 소주 맛을 구별할 정도는 못된다. 사십몇도 독한 민속주에 구미가 당기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그렇다고 술꾼이라고 오해를 하시면 곤란하다. 소주 3잔~5잔이면 족한 사람이니 너무 권하지도 마시라.  아니 다른 사람에게도 너무 권하지 말자. 술은 권하는 맛에 마신다고들 한다. 그래도 사양하는 사람에게는 딱 두 번만 권하자. 세 번 이상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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