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싱개(유성기)를 들어 본 적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였는지 어떤 노래였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발 들이밀 틈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꽉 들어찬 방안, 네모난 상자 위에서는 뭔가 빙빙 돌아가는데 그 상자 옆에 달린 뭔가를 손으로 돌리면 가느다란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요즘도 듣는 왜정 시대의 노래와 분위기가 비슷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한 시기라고 짐작이 됩니다. 큰집에 라디오가 생겼습니다. 구형 도시락만한 크기의 트랜지스타인데 한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손가락 굵기의 건전지가 들어갔는데 건전지 소모량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나중에는 선을 뽑아 내 크고 넓적한 밧테리를 연결하고 고무줄로 칭칭 동여 매었습니다. 조그만한 상자 속에 사람이 들어 있을까? 그 사람들은 잠은 잘까? 밥은 먹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대통령선거 개표방송을 들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 1963년도 이전으로 짐작합니다.
동네에 라디오가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여름날 저녁이면 큰집 마루와 멍석을 깐 마당에 동네 사람이 짠뜩 모여서 들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이주일의 힛송” 이런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가요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나오면 청년들이 좋아서 박수를 치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재치문답이라는 프로그램과 퀴즈 맞추는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2~3년 후 우리 집에는 없었지만 다른 집에도 라디오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골목길은 오가다 보면 라디오 소리가 자주 들렸습니다. 저녁 7시 40분에는 “라디오극장”이라는 연속극이 있었는데 그 때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노래와 드라마가 산골 처녀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저는 노래는 수없이 들었는데 드라마는 한 번도 못들었습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준이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흥겨운 가락으로 자주 들었던 “대머리 총각”이란 노래도 생각이 납니다.
5~6학년 때쯤 면 소재지 근처인 외가댁(은척면)을 가니 유선방송이 있었습니다. 유선방송이라 고 해서 요즘의 유선방송을 연상하시면 안 됩니다. 선 두 가닥에 스피커만 달랑 매달린 유선 방송이었습니다. 면 소재지에 있는 방송국(중계소?)에서 KBS 라디오를 틀어 주었다고 합니다. 긴급한 사안이 있을 때 자체 방송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갔을 때 그 동네 소가 없어졌다고 방송이 나왔습니다. 이 유선 방송은 69년도에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머물렀던 상주읍 초산2리에도 있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텔레비전이 상주읍내 중심가에는 있었다고 하는데 한 번도 구경을 못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72년도 자취집 근처에 있는 만화방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봤습니다. 그 시절 한창 유행하던 “여로”를 가끔 보았고 그 유명한 펠레 선수가 소속된 브라질의 “산토스”팀을 초청해서 우리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그것도 만화방에서 보았습니다. 스무살의 차범근 선수가 활약하는 것도 그 때였습니다. 그 이듬해 제가 자취하던 주인집에도 텔레비전이 생겼고 뮌헨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주인집 마루에서 보았고 키다리 김재한 선수가 선배라고 좀더 많은 박수를 보냈었습니다.
1975년ㅡ우리 마을에도 텔레비전이 생겼습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밧데리(축전지)를 이용하는 텔레비전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그 해 연말 방학을 맞아 고향집에 오니 별로 크지 않은 친척집 사랑방에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였습니다. “애들은 가라”고 내 쫓았지만 애들인들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소리라도 들으려고 문밖에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람이 하도 많이 와서 그해 겨울 그 집에서는 메주가 다 썩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79년 9월 입대를 하여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내가 근무하던 중대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 공동묘지 조금 북쪽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세계 챔피언 김태식(?) 선수의 1차 방어전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곳은 TBC(동양방송?)가 나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일직사관의 배려로 십 여리 정도 떨어진 민가(우리 중대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상점)에서 단체 관람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자만 가게 되었으니 고참들은 당연히 좋아라 했고 심신이 고달픈 이등병은 그냥 쉬고 싶었고 손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일직사관의 지침이 다시 내려왔습니다. 이등병들은 무조건 다 모시고(?) 가라고 했습니다. 위에서의 자상한 배려가 아래로 내려오면 강요가 될수도 있습니다. 아마 경험한 사람은 다 아시지요. 저녁 먹고 고참들 따라 민가로 가서 TV 앞에 진치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함성 소리가 들리더니 끝났다고 가잡니다. 고개 두 번 끄덕이니 경기가 끝이었습니다. 그때 경기가 2회전인지 3회전에서 KO 승이었지요 아마.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니 그만 하겠습니다. 라디오마저 없던 세상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놈의 세상 참으로 변화가 빠릅니다.
(2014년 6월 30일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2014년 6월 30일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