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자랑2
가족과더불어
2020-02-05 09:52:03
부모님이 계시는 늦은목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영 말을 안들었다. 따라오기 싫은지 자꾸 뒤로 꽁무니를 빼는 고무신을 양손에 집어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빠야 같이 가자"고 동생들이 뒤에서 소리쳤지만 오로지 빨리 뵙고 자랑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잘 굴러 가던 차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내려서 살펴 보니 오른쪽 뒷바퀴가 길옆 논인지 미나리꽝인지 진창에 빠져서 헛바퀴만 돌았다. 하는 수 없이 내려서 숨을 헐떡이며 비탈길을 걸어 올라 갔다.
드디어 집이 보였다. 마당으로 뛰어 들면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 아~ 아부지요~"
"애비 니가 우쩨 갑자기?"
엄마가 반색을 하고 나오셨다.
"ㅉㅉ 허둥대는 꼴하고는! 한갑도 지낸 기. 그래 먼닐이냐?"
아버지께서 방문을 열고 내다 보시면서 물었다. 들어가서 절을 하고 난 뒤 말씀을 드렸다.
"우리 머스마가 그렁께 이집 장손이~"
"알고 있다. 그런데 정식으로 발표난 거 아이자나?"
"학실하대요 이렇게 심사이언들이 ~"
나는 스마트폰을 열고 보내온 사진을 보여드렸다.
"그런데 오늘도 또 빈손으로 옹기가?"
둘러매고 다니는 손가방 속에서 소주 한병을 끄집어 냈다. 저번에 빈손으로 왔다가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챙겼다.
"안주는?"
엄마가 물으셨다.
"저번에 소주 사오라고만 ~"
"어이그 시건머리 하고는, 너 아부지 간도 안 조은데 어찌~"
"댓다 그만 내가 운제 안주 차잔나"
소주병을 따시더니 마시기 시작하셨다. 엄마는 원래 술을 안 드신다. 그전에 무더운 여름날 담배짐을 지고 난 뒤 나도 딱 한번 얻어 마신 기억이 있다. 너도 스무살이 되었으니 어른 앞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따라 주셨다. 땀을 흠뻑 흘리며 일하고 난 뒤라서 그런지 정말로 잘 넘어갔다. 오늘도 헐레벌떡 오르막길을 뛰다시피 걸었더니 목이 마르고 그래서 한잔 마시고 싶은데 혼자서만 드신다.
술한잔 얻어 마시는 것은 단념하고 다시 말씀을 드렸다.
"아부지도 이제 자랑하실 일이~"
"자랑은 무슨~"
"00네 아부지 손자 자랑한다고 불버하신~"
"불부다니 내가 운제? 자석 자랑 손자 자랑 하는 사람 모두 팔불출이다 이런 말햇지"
"그래도 이분엔 자랑할 만하자나유! 장년에 망내 사무실도 드갓고 "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도 한마디 보태셨다.
"사무실이 아이고 머라 사무관 승진항거다.'
"그기 그거 아인교. 이따가 사랑에 나가거등~"
그러는데 새벽닭이 운다. 한 마리가 우니까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운다.
"대따 그마 자랑은 무신~. 이제 시간 대씅께 가 바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한잔 잡수시고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실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컨둥했다. 나야 뭐 자식이니 그렇다 치고 옆사람한테 면목이 안 섰다.
언젠가 옆사람 친구가 시아버지한테 세배돈을 엄청 많이 받았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집 아들이 외고인지 뭔지 명문고에 들어갔다고 했었다. 그동안 뒷바라지 하느라고 애썼다고 칭찬도 들었다고 했다. 옆사람은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무척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훌쩍훌쩍 울면서 산을 내려 왔다. 가리점마을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를 기다리다 누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아버님이 변하신 것 같다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장손이라고 얼마나 끔찍하게 챙겼는데 그럴리가 없다고 하셨다.
"니가 머 잘못한기 음나?"
"읍다"
"정말로?"
"....."
그런데 그만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다.
"내가 잘못한기 만키도 하지만 딱 꼬지버 말할거는 생각이 안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캐도 이상하다. 내가 잘못하만 종아리를 치시지 속으로 삐지고 그럴 분은 아이자나"
"그건 니마리 마따"
그 때 옆에서 차를 기다리던 종고모님이 참견하고 나섰다.
"자네가 아부지 한테 돈 좀 갖다 드린나"
"거기서 돈이 머가 필요해요?"
"손자 자랑이든 자석 자랑이든 술한잔 내고 해야지 맨닙에 하만 밉쌍이고 팔불출인거 모리나"
"그건 알지요"
"그러자만 돈이 이써야지"
"앗 아라씨요"
급하게 지갑을 열어어 빳빳한 백원짜리 조우돈 열장을 끄내서 봉투를 찾는데 버스가 빵빵 경적을 울린다. 이차가 막차라 놓치면 안된다고 집에 가서 통장으로 입금하자고 옆지기가 말했다.
집에 가자 마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뱅킹을 시작했다. 그런데 입금이 안 되었다.
" 죄송합니다 입력하신 계좌번호를 확인하시고 거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문이 나왔다. 계좌번호를 잘못 입력한 것은 아닌지 몇번이고 확인을 했다. 그러나 실패였다. 문의하려고 전화를 하니 연결이 잘 안 되고 연결이 되면 자동 응답에 번호를 누르다 실패를 했다. 차를 몰고 은척농협으로 달려갔다. 현금하고 계좌번호를 내 밀었다. 직원이 단말기를 한참 조작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몇번을 반복하더니 뒷자리에 있는 높은 양반 옆으로 가서 대화를 나눈다. 한참 후에 자리로 와서는 돈과 쪽지를 돌려 주면서 말했다.
"이 번호는 이승의 계좌가 아니라서 송금이 안됩니다."
나는 그만 그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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