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이 좋다
추억과더불어
2018-07-21 07:41:47
명절은 참으로 즐겁고 신나는 날이었다.
우선 먹을 것이 푸짐했다. 알록달록한 과자 고기 과일 등 평소 구경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아주 어릴 때는 차례 상에 얹힌 것들 먹고 싶은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며 차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조상님들 차례상에 올리는 것보다 더 고급스러 것을 먹을 때도 많다. “저들만 맛있는 거 먹고”라는 생각이 들어 올리려고 하다가 “예전에 올리지 않던 않던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올릴까 말까 고민하기도 한다.
명절이 다가 오면 새 옷도 얻어 입었다. 설(추석)빔을 얻어 입고 같은 또래들과 만나서 내 것이 더 좋으니 네 것은 어떠니 하고 서로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날 입으라고 사 둔 새 옷을 그날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하루에 몇 번이고 입었다가 벗어 놓기도 했고 어떤 해에는 며칠 전부터 미리 입다가 명절에는 헌옷(?)이 되어 버린 기억도 있다. 그 시절에는 남자 옷(아동복)은 대체로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진 기성복이었고 여자 아이들의 것은 옷감을 끊어 와서 집에서 바느질해서 만들어 입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명절 차례는 큰아버지께서 고조부(제 기준으로 보면 5대조)까지 모셨던 장손이신 관계로 우리집 바로 뒤에 있는 큰집부터 시작되었다. 제군(자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연로하신 어르신네들께서는 안방에 그리고 젊은이는 마루에 때로는 마당에 멍석을 펴고 차례를 지냈다. 종부이신 할머니와 큰어머니께서는 안방에서 시중을 들고 우리 어머니와 출가 전이었던 누님께서는 부엌에서 일을 하셨다. 마련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큰아버지께서 질책을 하시고 그러면 큰어머님께서 뭐라고 변명을 하셨다. 누나하고 어머니께서 한 일인데 큰어머니께서 변명을 하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가 끝나면 간단히 음복을 하시고는 다음 집으로 이동을 하셔서 차례를 모셨다. 다섯 집을 순서대로 마지막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난 뒤에 식사를 했다. 그런 말을 사용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아점이 있었던 샘이다. 아주 어릴 때는 큰댁 차례만 지내고 밥을 먹었는데 조금 나이가 들면서부터 어른들과 함께 순서대로 돌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지내는 차례 그것이 왜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명절이 되면 마을 청년들이 연극 공연도 했다. “재건”등의 구호가 담긴 노래를 함께 불렀던 것으로 보아 5.16 직후에 한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계몽적인 내용이나 신파극조의 연극이었다. 넓은 마당은 객석이 되고 높은 대청마루가 무대가 되어 그 사이에 홑이불 등을 쳐서 막으로 사용했다. 마루 뒤켠의 방에서 대기하던 배우가 등장을 하고 역할이 끝난 배우는 다시 방으로 퇴장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극에서는 여자 배우가 등장을 했지만 그전에는 남자 배우가 여자 역할까지 맡았었다. 아마루 연극이라도 다 큰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안기기도 하는 역할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연극이 끝나면 노래 자랑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는 집을 떠나 생활을 했기에 명절은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명절이 아니라도 가끔 고향집을 찾기는 하지만 열서너살 전후해서 저멀리 서울로 부산으로 돈벌이하러 떠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는 설레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절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2월에 맞이한 설은 남의 집(사실은 이모님 댁, 어쩌면 사돈 댁)에서 보낸 참으로 쓴 맛이었다. 차례를 지낼 때 부엌에서 아침을 먹고 등교를 했다. 명절이 되어서 고향으로 가는 차편은 유달리 복잡했다. 고등학교 시절 명절전에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객차에는 사람이 가득했던지 피란시절처럼 화물칸에 사람을 태웠다.
전역하고 복직했던 첫해 포항고등에서 맞이한 추석도 잊을 수 없다. 거기서 고향집까지 여섯 시간은 소요가 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정상 수업 마치고(실제로는 단축 수업을 했던 것 같은데 전혀 짐작 못했음) 집에까지 갈 수가 없었고 또 그 다음날 차례 지내자 마자 올 생각하니 까마득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인심이나 쓴다고 남의 일직(숙직?)을 맡아 대신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발표가 났다. 추석 다음날도 공휴일로 한다고 그해가 1982년도였다.
명절 준비는 놋그릇 닦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님과 큰어머님 그리고 누님이 지푸라기를 뭉쳐서 재깨미(구운 기와장 깨진 것을 부순 가루)를 발라 제기와 기타 놋그릇을 문질러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았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입으실 한복을 손질하셨다. 안감을 뜯어내고 빨아서 말리고 풀을 먹이고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고 꿰매고 다리고 밤이 늦도록 바느질을 하셨다. 자다가 깨어 보면 호롱불 켜놓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자주 보였다. 명절을 삼사일 정도 앞두고는 떡 방아를 찧었다. 벼나 보리의 탈곡과 밀가루(제분)은 기계로 했는데 떡 방아는 디딜방아를 이용했다.
이틀쯤 앞두고는 동네에서 돼지를 잡았다. 널판을 조금 놉게 걸쳐 놓고 돼지를 눕힌다. 그리고 밑에는 큰 양푼(양동이)를 받쳐 놓고 과도로 돼지 목을 따서 흐르는 피를 받았다. 어린 돼지는 그냥 목을 따고 조금 크서 감당하기가 어려울 때는 망치(도끼) 등으로 정수리를 때려서 실신 시키고 난뒤에 피를 뺀다. 이 때 돼지가 지르는 비명 소리는 굉장히 요란하다. 노래를 잘 부르지 못ᄒᆞ는 사람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돼지 멱따는 소리”라고 비유를 하는데 바로 이 소리다. 이 피를 잘게 쓴 채소와 섞은다음 잘 씻은 돼지의 대장에 넣어서 찐 것이 옛날 순대다. 그런데 대장을 씻을 때 소금만을 사용했으니 당연히 구린내가 났다. 이렇게 잡은 돼지 고기는 온 동네 사람이 한 근씩 또는 반 근씩 사갔다. 물론 그것도 못 사먹는 사람도 많았다.
명절이 다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시절이 있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엄마 며칠 남았어” “다섯 밤만 자면 추석이야?” 라고 물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너는 추석이 뭐 그리 좋으냐?” 그리고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주 어릴 때는 맛있는 거 먹는 게 좋았고, 객지 생활 때는 고향 가는 게 좋았다.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서는 형제자매 일가친척 그리고 오래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마냥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명절이 되어도 아내의 일을 도와 줄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환경 탓이라고 할까 아니면 눈치 보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들리기 시작을 했고 “나는 제사가 싫다”라는 책의 제목이 유명해졌다. 그리고 또 그 때의 “어머님의 말없는 한숨”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고 도와주려고 나섰다. 그런데 아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내가 혼자 해야 할 때는 안 도와 주고” 남동생 둘이 결혼하여 차례 준비할 사람이 세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손놀림이 워낙 둔해서 부엌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좀 서투르다. 그래서 명절 준비할 때 어린 조카들 데리고 집밖으로 나가서 돌보고 놀아 주었다. 끝나고 나면 수고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도 타서 돌린다.
나는 명절이 좋다. 그리고 육남매나 되는 나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왁자지끌하게 어울리는 것도 참 좋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여자들이 시댁 식구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것은 극기훈련”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쩌면 좋을까 정답은 같이 일하고 같이 즐기는 남녀 구분이 없는 “평등한 세상”밖에 없는 것 같다.
페이스북(2013.9.16) 카카오스토리(2013.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