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지도 않은 대추를
가족과더불어
2018-10-07 22:52:39
"한잔만 받으셔요"
"그래 따라 바라"
아버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한잔씩 올렸다.
"캬~ 술맛 조타"
아버님께서는 기분 좋게 한잔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 놓으시더니 상위를 두루 살피셨다. 그리고는 접시위에 놓은 대추를 가리키며 저를 향해 하문하셨다.
"이기 머냐?"
"대춤니다"
"그걸 누가 모리냐?"
"예에?"
"항개도 안 이거짜나"
그러고 보니 시퍼런게 조금도 익은 것 같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뒤를 돌아보고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누가 저런 걸 땄어?
"뒤안에도 안 익어꼬 청너매 밭에 가도 모두 다 그래요"
"그럼 농암자아라도 가 보등가"
"올개는 추석이 빨라 가이고 장에도 이근거는 업다네요"
"그럼 작년에 말리 둔거라도~"
"이전부터 추서게는 햇가일을 썻자나요"
옥신각신 주고 받는데 아버님께서 역정을 내셨다.
"쯔쩟 마지란 기 우째 이리 한심하노"
"예?"
"니가 하든 동생이나 아들 딸에게 시키든 마지마게 챙기고 검사하는건 니 목시다"
"보기는 저래도 맛은 있을끼라요"
"머 이쓸끼라? 그럼 니나 마이 머거라"
접시에 담긴 대추를 한웅큼 집어서 나를 향해 휙 던지시더니
"명절이라 항끼 어더 먹꼬 갈라캤디 먹도 못하는 걸 줘? 그만 가야 하겠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 나셨다. 누님과 동생들이 모두 일어나서 매달렸다.
"밥도 안 잡수고 그냥 가시면 우짭니까?"
나는 너무도 참담한 심정에 대꾸할 말도 떠 오르지 않았다. 그냥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여기저기 흩어진 대추를 주워 모았다.
"대추하고 감은 빼 노코 다른 기나 마이 잡수고 가이소. 마지가 대 가이고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참말로 지송함니다. 그리고 이 몬먹는 대추는 잘 못한 지가 다 먹겠심다."
그리고는 네 갠지 다섯 알인지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우적우적 씹었다. 어머님이 놀라서 말씀 하셨다
"니 머하는 짓이노"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억지로 삼켰다. 정말로 맛이 하나도 없었다. 대추씨가 목에 걸린 것처럼 약간 거북했지만 참았다. 상위에 남아 있는 것까지 마저 먹으려고 접시를 집어 들었다. 어머님께서 내 팔을 잡으셨다.
"영감, 좀 말리야 안 대겠오?"
"그래 그만해라. 담부터 잘하겠다는 뜻으로 알고 바비나 먹고 가야겠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고 난 뒤 두분께서는 자리를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리고 나를 돌아 보고 말씀 하셨다.
"그런데 니 마이 늘었다"
"예?"
"그거를 한 입에 털어 너을 생각을 우째 핸노?"
"마자요 영감이 조매만 머라카만 절절매든기"
어머님께서도 한마디 하셨다.
"야담에서 배았지요"
"호오 그래?"
"그러니까 안동김씨문중 잔치에 흥선대원군이 트지블 자반는데~"
"그건 나중에 듣자 그런데 둘째 잔은 왜 안 주노?
"명절에는 월래 무축단잔이라고 해서~"
"그땐 여러집 댕기민서 차레차레로 차레를 지내다 보이 시간을 애낄라고 그랬지"
"마자요 언제부턴가 여섯지비 돌아가민서 한잔씩 따루니까 조았는대"
어머님께서도 한마디 거들고 나오셨다. 다시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전대로 무조건 따라 하는기 조은건 아이다"
"예"
"육남매가 때로는 삼형제가 한잔씩 올리고 어린것들 아라 듣게 충문도 풀어서 일그니 참 조터만. 우째 오늘은 꺼꾸로 돌아 가는구나"
"그렁께 그게~ "
"강신도 빼 먹었고"
"저 어린기 제사상위에 자꾸 덤빌라 캐서. 뒷집으로 데리고 가서 보라고 카다가 ~"
"그래 가이고 마미 급했다고? 어린기 좀 덤비도 갠찬지만"
"____"
"생각나는대로 대충하지 말고 미리 저거노코 해라"
"그래 한 적 읍선는데~"
"발전을 해야지 우째 옌날대로 하나. 그리고 왕실에서 사용하던 의게라는 있자나. 그렁거 따라 하만 조차나"
"아, 예"
"정성을 다마서 제대로 해라. 형시기 소홀하만 내용도 읍는기 댄다. 이만 간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추석차례를 지내고 며칠 뒤에 보니 차례상에 올렸던 시퍼런 대추가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음식들은 많이 줄었지만 그것만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먹지도 못하는 것을 올린 것이 아닌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뭐 예전부터 추석상에는 햇과일을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추석이 너무 빨라서 어쩔 수 없다고 위안을 삼기는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서 너댓개를 먹어버렸습니다.
태어난지 십칠개월 지난 어린 것이 제사상 차릴 때부터 설치고 다녔습니다. 뒷집으로 데리고 가서 보라고 하려다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언젠가는 조상을 받들 자손이니 철없는 어린 것이 하는 짓을 부모님께서도 이쁘게 보아주시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조금 급했던 모양입니다. 최근 명절에는 삼형제가 각각 한잔씩 올렸었습니다. '예전에도 명절에는 무축단잔이었다'는 핑계로 이번 추석에는 한잔만 올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의도한 바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향불도 안 피웠고 강신도 빠뜨렸습니다. 차례고 제사고 정성이 전부인데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버님 제사때부터는 모든 절차를 사전에 기록해서 그것을 보면서 진행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조선 왕실의 "의궤"를 모방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형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형식을 무시하면 내용도 소홀해 지는 것이 중생의 한계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해야 하겠지만 어디까지가 좋을지는 스스로 판단해야 하겠지요
***아버님이 던진 대추를 한입에 털어 넣는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읽은 야담을 모방했습니다. 작자도 제목도 생각이 안납니다. 기억나는 대로 대충 재구성해서 올립니다.
고종황제께서 즉위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막을 내렸을 때입니다. 김씨 문중에서 잔치가 있었습니다.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흥선대원군이 하객으로 참석했습니다. 상을 받아서 수저를 들다가 하인을 불러
"비상이 들어서 못 먹겠으니 갖다 버려라"
고 명했습니다. 분위기가 살벌하게 얼어 붙었습니다. 드디어 안동김씨에 대한 "피의 복수극"의 시작되는구나 생각 했습니다. 생트집인 줄 뻔히 알면서도 따지고 들 수도 객관적으로 검증을 할 수도 없습니다. 김씨문중이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는절대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인이 음식 그릇을 받아 들고 절절매고 있는데 주인인 김00대감은 그릇을 빼앗아 그냥 두손으로 집어서 삼켰다고 합니다.
"농담 한번 한 것을 두고 뭘 그리 놀라시오"라고 흥선군은 웃고 말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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