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이야기
추억과더불어
2018-12-29 23:27:06
처음으로 바퀴달린 것을 타 본 것은 “구루마”였다. 물론 우리 마을에는 자전거도 없었고 우마차도 없었다. 사과 궤짝이나 소주 궤짝 바닥 아래 측에 3~4CM 굵기의 의 길고 둥근 막대를 앞뒤로 고정시키는데 이것을 심보라고 했다. 그리고 굵은 통나무를 2CM 정도로 짤라 가운데 구멍을 뚫어 보의 양 끝에 끼우면 동태(바퀴)가 되었다. 앞에 끈을 달고 우리 같은 꼬맹이 하나 쯤은 태워서 끌고 다녔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가득골(우리 동네 위쪽 골짜기)에서 산판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무를 실어 내기 위한 “재무시”라는 게 매일 같이 드나들었다. 우리 꼬맹이들은 그 차 한 번 타 보고 싶어서 매일 같이 그 뒤를 따라 다녔지만 한 번도 못 타봤다. 우리 친구 중 하나는 사촌 형님이 목상(그 때는 뭔지 몰랐지만)이라서 가끔씩 그 차를 얻어 탔다. 그래서 엄청 목에 힘주고 다녔고 우리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산판이 끝났고 더 이상 차 구경할 기회는 없었다. 가끔씩 부모님 따라 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번화했던 농암 장에서도 차를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거기에서 만난 한 동네 친구가 차 구경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 가 보면 이미 차는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자동차를 타게 된 것은 6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이종 형님을 따라 신기[문경군 점촌읍]에 사는 이모님 댁을 방문했다. 농암까지 시오리 정도 걸어서 소형버스[그 때는 “합승” 또는 “아이노리”]를 타고 가은역에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고 주평역까지 갔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점촌까지 5,6학년이 수학여행을 다녀 왔다. 가은에서 탄광을 보고 신기에 있는 문경시멘트공장을 거쳐 점촌읍내에서 극장 구경을 했다. 두어 달 전에 먼저 거쳐 갔던 길이었기에 친구들에게 목에 힘을 주고 잘난 체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기차를 다 보았을 것이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기 위해, 내가 숙식을 할 이모님 댁으로, 입학식 이틀전에 아버님과 함께 출발했다. 버스 정류장 가까이 있는 외가-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면소재 근처-까지 이십 여리를 걸었다. 거기서 하루 밤을 자고 아침 첫차를 타고 읍내로 나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타고 갈 첫차는 밤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마도 도망갔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나와 아버님 외숙부님 셋이서 은척면 봉상리에서 상주읍 초산리까지 약 오십여리를 걸었다. 중간에 외서면 봉강리에 있는 이모님 댁에 들러서 점심을 얻어 먹고 이모부님까지 합세하여 넷이서 걸었다.
그 시절 두어 달에 한번 정도 토요일에 고향집에 왔다가 일요일 아침이면 이십여 리를 걸어 은척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곤 했다. 그런데 비가 내리는 등 거기서도 버스를 탈 수 없는 사정도 가끔 생겼다. 그러면 은척에서 공검면 하흘 중소 동막을 거쳐 양정까지 삼십여리를 다시 걸었다. 열 너댓 살 꼬맹이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등학생 형님들 뒤를 죽자 사자 따라 다녔다. 길도 모르는데 절대로 뒤처지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 어쩌다 지나가는 차를 보면 그 속에 탄 사람은 별천지의 사람처럼 보였다. 스무살 시절에는 아버님께서 간경화 진단 받고 돌아가시기 두어 달 전, 배에 복수가 차서 걷지도 못하시는 분을 경운기로 모시고 버스 타는 곳까지 갔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지처럼 생각했던 우리 동네에 노선 버스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78년도 말이었다.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자 역시 신이 난 것은 동네 꼬맹이들이었다. 우리가 그 옛날 화물차 꽁무니를 따라 다녔던 것처럼 그들은 막차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8~9시 쯤) 걸어서 버스 마중을 나갔다. 이웃 마을과 중간쯤에서 버스를 만나곤 했다. 운 좋으면 공짜로 버스를 얻어 탔고, 아니면 그냥 걸어서 돌아 와야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가까운 이웃 중에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1986년도였다. 그리고 하나씩 둘씩 승용차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4년에 동료 직원 예닐곱이 고물 자동차 한 대를 사서 함께 운전연습을 두 번 낙방하고 세 번째 합격했다. 그런데 교육받을 때 동영상에서 본 끔찍한 사고 장면을 보고 난 뒤에는 운전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옆에서는 불평이 터져 나왔지만 차를 몰고 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96년 여름 남자 동료 직원 이십 여명 중에서 자동차가 없는 사람이 나와 00근샘 딱 둘이었다. 하지만 지역만기에 걸려서 97년도부터는 타지역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리부터 운전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해 승용차를 구입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분께 배신자가 되었다.
거의 이십년 지난 이야기다. 그 프라이드는 13년만에 폐차장으로 갔다. 조금 더 탈 수 있었지만, 정부가 나서서 무슨 세금 감면을 해주면서 소비를 권장하는데다가, 회사에서도 얼마 할인해주고 하는 상황이었고, 무작정 아끼고 절약하는 것도 이제는 미덕이 아니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포르테로 교체했다. 2010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삼년 후 ㅇㅇ가 장거리 통근에다 카풀을 해야 한다기에 포르테마저 양도하고 지금은 스파크를 타고 다닌다. 우리 주변에는 승용차를 두고 사회적인 품위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십 여리를 걸어 가면서 승용차 타고 가는 사람을 마치 별천지의 사람인양 부러워했는데, 승용차를 운전하고 다니는 내가 참으로 신기하다.
“이차가 뭐 어때, 잘만 굴러 가는데! 백수가 이정도면 감지덕지”
남보다 조금 늦게 승용차를 마련하여 가족들이 함께 타고 다니던 그 때의 감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길을 가다가 흰색 프라이드를 보면 00에게 한마디 한다.
“00야 우리 차 누가 훔쳐 간다. 빨리 가서 잡아!”
“에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게 우리 차잖아요!”
그러다가 다른 색 프라이드를 보면
“야, 우리 차 누가 훔쳐서 파란 색칠을 해 놨네”
“---”
그리고 조금 세월이 흐른 뒤
이제는 00란 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지나가는 트럭을 보고
“아빠, 누가 우리 차 훔쳐가서 저렇게 뻥튀기 해 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