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집의 내력(2)_어머님 집을 짓다
집과더불어
2019-01-20 09:03:02
집을 새로 짓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동생들도 장성해서 곁을 떠나고 어머님 혼자서 사실 때였다. 구조 자체가 아주 불편했고 많이 낡았기 때문이었다. 그 제안에 어머님께서 처음에 보이신 반응은 "시컨둥"이었다.
“내가 살만 을매나 산다고~”
설득을 하려고 노력하는데 누군가가 옆구리를 찔렀다.
“이 사람아 자꾸 그카만 한지베서 모시고 살기 실타는~~”
그래서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눈치만 살피다가 몇 년이 흘렀다.
“새로 지~ 노오만 나중에 니들이 드러와 살만 조켓지?"”
어느날 태도가 그렇게 바뀌셨다.
그래서 큰채를 뜯고 새로 지었는데 병자년 세모였다. 12평짜리 조립식 판넬집이라 공사는 금방 끝이 났다. 초겨울에 시작해서 한겨울에 입주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정면 가운데 현관이 있고 오른쪽 앞에 큰방이 있었다. 큰방 전면에도 창이 있었고 큰방 뒤에는 욕실겸 화장실 그리고 그 안쪽에 다용도실을 두었다. 그리고 왼쪽 뒷면에 작은 방을 하나 두었다. 현관 왼쪽 전면과 좌측면에 작은 창을 두었다.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짓고 보니 불편한 점이 좀 있었다. 한겨울에 사람이 모이면 판넬 이음새 부분에 이슬이 맺혀 흘러내렸다. 유리창에도 그랬는데 결로현상이라고 했다. 도배한지 얼마 되지 않아 더러워 졌다. 어머님께서는 보일러 기름값이 아까워서 군불 때는 집에 가서 놀다 자고 오시는 날도 많았다고 들었다. 장기간 집을 비울 때 수도꼭지를 약하게 열어 두면 얼어서 하수도가 막혔고 실내온도를 높이고 잠가 두면 상수도 관(옥외 부분)이 얼었는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물론 좋은 점이 훨씬 더 많았다. 새집이라고 지어 놓고 보니 나도 그렇고 누님이나 동생들이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불편해서 오기 싫어하던 우리 아이들과 조카들도 동행을 했다. 어린 것들이 사촌들이라고 사이좋게 어울노는 것이 보기에 좋았다. 명절 차례와 아버님 제사도 시내 우리집에서 모시다가 입주 이후 맞은 첫설(정축년)부터 여기(새로 지은 집)서 차렸다. 그리고 이월 초하루(음력)가 어머님 생신(칠순)인데 입택을 겸해서 동네 이웃사람들을 모시고 정을 나누는 기회도 있었다.
새집을 짓고 어머님께서 이집에서 십년 정도 사셨다. 그리고 나이가 드시고 혼자 지내기 어려워서 우리집과 요양원을 거쳐 멀리 떠나셨다. 부모님께서 물려 주신 집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죄송하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집을 지은 일이 차선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집에서 공부를 한 막내 동생이 법무부 교정직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집을 임진년에 철거하고 새로 지었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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