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을 중수하고
집과더불어
2019-01-20 19:23:29
기축년(단기 4282년)년에 지은 큰집(뒷집) 큰채를 신묘년(4344)년 가을에 중수를 하니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2년이나 넘긴 집이었다. 주변에서는 말들이 참 많았다. "확 뜯고 새로 지어" "수백 년 된 국보급 문화재도 쌔비맀는데 무슨 미련이 남았나" 등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집에 불과하겠지만, 할머니와 큰아버님 내외 그리고 우리 아버님 어머님의 손때가 묻었고 내가 태어난 집이다. 나로서는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 줄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집을 짓기 전에는 황령리 578번지(현재 이동수씨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아직 분가하시기 전이었고 아홉 살 위의 누님께서도 그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큰아버님께서는 자식 키우기에 실패를 거듭하셨고, 고심 끝에 새집을 지어서 이사를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식을 얻어 대를 잇고 조상의 제사를 받든다는 할머니와 큰아버님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집이었던 것이다. 큰아버님의 자식 열 가운데 여기서 태어난 사촌 형님 한분과 동생 하나가 성장해서 가정을 이루었으니 그 소원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다.
그 집에서 내가 태어났고 얼마 후 우리 부모님은 바로 앞으로 집을 짓고 분가를 했다. 뒤에는 큰집 앞에는 작은집 형제간이 앞뒷집에서 오손도손 살았다. 아버님 어머님이 부부싸움을 하시면 할머니께서 금방 달려오셨고, 사촌 형제간에도 매일 만나서 놀았다. 옛 사람들은 내외종 사촌보다 친사촌이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가까이 살고 자주 만나 싸우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1975년(?) 큰집과 작은집 모두 지붕개량을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아버님께서 그리고 또 이태 후에 큰아버님께서 세상을 뜨셨다. 그리고 우리 형제나 사촌 형제 모두 타처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머님 큰어머님 다 오랫동안 홀로 사셨다. 그러다 보니 집들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지으신 우리 집(작은집)을 보존하지 못 했는데 큰집마저 그냥 무너지려고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2010년에 터를 먼저 구입하고 형님께 상의를 드리니 ‘시골집에 관심을 둘 형편이 안 되니 동생이 그냥 사용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당동에 사시는 집안 어른이신 당숙께서 그래도 그냥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며칠후 서울로 올라가 형님과 나 당숙어른 셋이 모여 계약서도 쓰고 잔금도 치루었다.
구입후 사랑채 지붕부터 새로 덮었다. 본격적인 수리 계획은 없었고, 비는 새고 있기에 선택한 임시방편이었다. 큰채 수리를 위한 고민을 하다가 이듬해 여름 방학 때 견문을 넓히기 위해 교육까지 받았다. 전교조 경기지회에서 운영하는 한옥학교인데 교육을 마치고 교수님을 초빙해서 자문도 받았다. 교수님은 사정상 맡을 수 없다고 해서 마을 출신 목수인 이화옥씨가 책임을 맡았다.
지붕의 스레트와 흙까지 걷어내고 서까래와 모서까래<주1> 중 상한 것을 교체했다. 오래 된 것을 전면으로 배치하고 새 것을 뒤로 보내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반대로 했다. 한 치 각목으로 내벽에 틀을 짜고 그 위에 석고보드로 단열시공을 한 후에 도배를 했다. 방안 천정은 원래 고무<주2>를 누른 것이었는데 큰방은 워낙 험해서 내벽과 같이 덮었다. 건너방 천정은 큰방보다 상태가 조금 양호하고 천정에 상량기록이 남아 있기에 덮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방구들은 이동수씨가 맡아서 새로 놓았다. 수리 전부터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불길이 통하는 내고래였는데 그대로 살렸다. 자연석으로 방구들을 놓는 것을 보고 서울에서 온 목수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부엌도 현대식으로 개조하자는 의견은 있었으나 집 자체가 좁아 한계가 있다는 판단과 한옥의 구조를 변경하지 말자는 생각에 상수도 넣고 배수구 설치로 끝냈다.
일본을 여행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작은 시골 역까지 오래 된 것이 참 많은데 우리는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오래된 것이라고 뜯어내고 새로 지은 것이 너무 많다. 오래된 것은 명문대가의 후손이나 민속촌에만 남았다"고.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버님 큰아버님께서 함께 지으신 집을 수리해 놓고 보니 가슴 뿌듯하다.
나를 따라 고향에 들어와 같이 불편한 삶을 함께 하면서 우리 형편에도 거금을 들이는데 동의해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집을 양도해준 사촌형님 수리의 모든 책임을 맡아 애쓰신 목수 이화옥씨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한다.
기축년(단기 4282년) 지은 집을
신묘년(단기 4344년) 10월에 중수를 하고
갑오년(단기 4347년) 가을에 씀
<주1> 표준어는 추녀인데 수리하던 목수는 '모서까래'라고 함
<주2> 참쌀 풀을 모래와 섞어서 바르는 방식인데 우리 동네 어른들은 '고무를 눌렀다'고 하고 한옥학교 교수님은 '고미'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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