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돈을 땄으만
가족과더불어
2019-06-26 23:30:18
예초기 매고 풀을 깎고 들어와서 보니 부재중 전화가 여러 번 찍혀 있었다. 모두 만복이가 한 것이었다. 연락을 취했더니 한턱 낸다고 여섯시까지 시내 어디로 나오라고 했다. 나가 보니 참으로 푸짐하게도 차렸다. 좀 시장했던 탓으로 정신없이 먹다가 물어 봤다. 이렇게 대접 받으니 고맙기는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고나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만복이 어머님 백수연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고 곱게 차려 입은 만복이 모친이 앉아 계셨다. 웃음 소리가 가끔씩 들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났다.
그럼 우리가 큰절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 말했다. 함께 어머님 앞으로 가서 다 같이 큰절을 했다. 만수무강하시라고 누군가 덕담도 했다. 너무 오래 사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답을 하셨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들 들고 즐겁게 노시라고도 말씀하셨다. 자리로 돌아와서 아는 체하는 무식이가 말했다.
"만복아 자네 모친 무슨 띠냐"
"신유생 닭띠다."
"그럼 우리 나이로 아흔아홉이네"
"응 맞아여"
"그럼 백수는 내년 아잉가"
"몰라 주변에서 모두들 올개 하는게 맞다고 해서 큰형님이 결정하셨어"
"어이 박식아 맞나"
"한문 일백백자에서 하나를 빼면?"
"글자에서 하나를 우째 빼노"
"그러니까 그 글짜에서 위의 한일자를 지우면?"
"그래도 백자네 흰 백자"
"그렇다 백수는 일백백자가 아니고 흰백자다 그러니까 아흔아홉살이 백수다"
"아하 그렇구나"
"만복이 모친께서 아직도 정정하시네!"
"맞아 말씀하시는 것 들어 보니 심신이 모두 강건하시고"
"응, 어저께도 나하고 고스톱 쳤다."
"머라, 고스톱? 민화투도 아이고!"
"그래서 전과는?"
"응 내가 이천원 땄지!"
"머? 그럼 어무이 돈 가이고 생색은 네가 내는구만!"
여기서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술 권하는 사람이 많아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한두 잔은 괜찮다고 권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냥 뿌리치고 일어섰다. 경찰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집에 딱 버티고 계신다고 엄살을 떨었다. 친구 박식이도 볼 일이 있다면서 함께 일어섰다. 그때 노래 소리가 들렸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바~암 낮으로 애쓰는 마음 /지인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똑 같은 복장으로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 대여섯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큰 아이는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콧등이 시큰해서 한참 듣고 있는데 그만 가자고 친구가 재촉을 했다. 돌아 보니 친구 눈에도 이슬이 맺혀 있었다. 친구집까지 가는 길에 차안에서 내가 한마디 했다.
"손주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 가슴이 찡하더만"
"자네 눈에는 갸들이 손주로 보이더냐?"
"그럼?"
"증손들이지 백살이나 잡수셨고 벌써 우리가 손주 볼 나이자나"
"아 그렇구먼, 복 많은 집안 한없이 부럽구나!"
조금 후 친구가 내리고 사십 여분 집으로 가면서도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이름이 만복이라서 집안에 복이 가득한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냈다. 옆 사람이 “이 시간에 웬 술이냐”고 참견을 하다가 "차 때문에 잔치 집에서 마시지 못한 대신"이라고 하자 입을 닫았다. 같이 마시자고 권해도 응하지 않아 혼자서 반병을 마시고 누웠다.
그런데 잠은 오지 않고 계속 이리 눕고 저리 눕고 하다가 결국 일어났다. 자동차 열쇠를 찾아 들고 나섰다. "이 야심한 밤에 어디를 가느냐? 술 마시고 차를 몰면 어떡 하느냐" 옆에서 말리고 나섰다. 말리다가 안 되니 열쇠를 빼앗아 대신 차를 몰고 같이 고향집으로 갔다. 주무시다가 일어난 엄마하고 둘이서 민화투를 쳤다. 옆 사람은 옆에서 구경하다가 잠이 들었다. 내리 세 판을 이겨서 삼백원을 땄고 백원은 돌려 드렸다. 이백원을 쥐고 만복이와 다른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한턱 낸다고 우리 마을 점빵으로 오라고 했다. "니 누야하고 동생들도 불러라"고 엄마가 말씀하셔서 같이 불렀다.
우리 마을 유일한 점빵은 아재(당숙)께서 하시는 곳이다. 무서울 정도로 엄격하셨지만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유달리 관심을 많이 보이셨던 분이다. 부모님 심부름을 가면 과자 하나를 꼭 얹어 주셨다. 나중에 서울 사당동으로 이사 가셨는데 내가 군복무할 때 외박 나가면 가끔 들렀다. 나는 만복이와 친구들 앞에서 호기를 부렸다. 돈 이천원을 끄내 들고 흔들며 "오늘 내가 다 산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누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간섭을 했다.
"그 돈 어디서 났어?"
"왜요"
"엉뚱한 돈은 아니지"
"걱정마소 엄마한테 땄으니까"
그때 당숙어른께서 말씀하셨다.
"조카 니가 올개 및이냐"
돌아다 보니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열아홉 살입니다"
"오빠 무슨 말씀이요 지가 올개 항갑인데"
바로 밑의 동생이 나섰다.
"항갑 지낸 사람이 엄마 돈으로 한턱 낸다고?"
"삼만원 따서 만원은 돌려 드리씀니다"
"ㅉㅉ 그걸 자랑이라고 하노~"
"만복이가 자랑하기에 너무 부럽고 해서~"
그러자 만복이가 나섰다.
"나는 말이다 어머님하고 노라 드릴라고 고스톱 쳤다. 이천원 따서 밋배로 갚아 드릿다."
"머~머~ 진작 그러케 말해야지~"
박식이도 나섰다.
"우리가 어른들하고 화투치면 져 드리는 거야. 아니면 내 돈 좀 보태서 한잔 사도 되고. 되로 받고 말로 준다는 말도 모리나 너는?"
말문이 막혀서 그냥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쉬고 있는데 누야가 나섰다.
"동생 니가 잘몬했다. 당장 가서 돌려 드리고 온나 내돈도 좀 보태 주께“
누야와 동생들이 모아 준 돈과 화투쳐서 딴 돈 합해서 십만 원을 손에 쥐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놈의 버스가 한참 가다가 멈춰 섰다.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끊기고 다리도 떠내려가서 못 간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돌아가는 길이 있다고 말했다. 기차를 타고 양정역에서 내렸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등학생 시아들이 앞장을 섰다. 모르는 길 따라서 가는 길이기에 한발이라도 뒤쳐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장승처럼 키가 큰 흥아들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을 때 열네 살 어린 나는 길을 잃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따라 붙었다. 동막 병암 중소를 거쳐 목고개를 넘었고 하흘을 지나 은척까지 왔다. 여기서부터는 내 혼자였지만 다 아는 길이기에 괜찮았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빨리 가서 어머님을 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도 떠내려 가고 없었다. 청재를 넘어서 우리집이 보이는 곳까지 가니 동네 어른들이 나와서 석가래 셋을 걸쳐서 임시 다리를 놓았다. 도랑 폭은 좁았지만 물살이 거셌다. 내려다보니 아찔한 게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건넜다. 그런데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낙동 어디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셨다고 했다. 낙담을 하고 있는데 “마지가 대 가이고 그것도 모르고 있었냐”고 누군가 혀를 끌끌 찼다.
요양원으로 가려고 차의 시동을 거는데 큰엄마가 나타나셨다. 산에서 고사리를 꺾어 오셨다고 했다. 기왕 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했다. 오랜만에 와서 그냥 가는 수는 없다고 하셨다. 마루에 앉아 커피만 한잔 얻어 마시고 일어섰다. 요양원 출입문 앞에는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산 사람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막아섰다. 왜 그러냐고 부모 자식간에 면회도 안 되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른데 당연한 일 아니냐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면회는 일년에 단 한번만 그러니까 제사 날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슨 노래인지 가사인지 입으로 중얼중얼 읊었다.
우리들을 길러 낼제 어떤 공덕 들였을까
진 자리는 자비하신 부모님이 누우시고
마른 자린 아기 눕혀 음식도 맛을 보고
쓴 것은 부모님이 잡수시고 단것은 아기 먹여
오뉴월 짧은 밤에 모기 빈대 뜯을세라
고단하신 몸이지만 괴롭다고 않으시고
다 떨어진 살부채로 설렁설렁 흔드시며
온갖 시름 다하시네
괜히 서러워서 눈물을 훔치며 서 있는데 누군가 쪽지를 내 밀었다. 이게 뭘까 하고 받아서 펴 보니 삐뚤삐뚤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엄마본더시 누우하고 동상덜캉
잦우 만내 노라 하토처가이고 돈도 때이주고>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 누가 주더냐고 물어 보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누야가 한 전화였다.
"면회 못 한 대여! 대신에 엄마가 쪽지 보낸는데 누님하고 하토쳐서 돈 때이 주래여. 그렁께 놀러 와서 내돈 따가"
"무슨 소리냐? 나 만복이다."
"......"
"어제 한잔도 안해 노코 아직까지 비몽사몽이나?“
그제사 정신이 들었다.
"응, 그렁께 자네가 하도 부러버서 집에 와서 차 시아 노코 한잔 했다. 어제 손님 대접하시니라 애썼지?"
"와 줘서 고맙다고! 다음에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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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9일에 완성하여
2019 상주동학농민혁면기념문집 [녹두꽃 필 때]에 실었습니다.
8월 7일 책의 출간과 함께 온라인에서도 공개합니다.
기념문집 발간을 위해 애쓰신 고창근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사진도 작가님이 올리신 것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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