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더불어

우리에게도 수학여행은 있었다.

임재수 2022. 11. 4. 18:12

우리에게도 수학여행은 있었다.

추억과더불어

2020-06-14 15:35:11


잊을 수 없는 추억, 우리들에게도 수학 여행은 있었다. 요즈음은 형편이 넉넉해져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여행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들에게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1970년 10월, 기껏 해야 친척집 나들이가 고작이었던 우리들에게 수학여행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 시간에 ‘수학 여행의 노래’를 배우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지금의 학생들도 여행 가기 전에 노래도 배우고, 조편성도 하고 장기 자랑 준비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 “상중 건아”들에게는 우리만의 노래가 있었으니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상중건아”가 아닐 것이다.

“천봉산 울안을 잠시 벗어나, 가을 맞아 상중건아 천리를 간다. 추풍령 마루턱 갈바람 타고, 한밭 지나 삼천궁녀 넋을 찾아서, 고란초 향기에 여독을 풀자. 고란초 향기에 여독을 풀자.”

“하늘과 땅사이 어이 넓은가, 황금물결 일렁이는 넓은 벌지나---”(그다음 구절이 생각이 안 납니다. 기억하는 사람 올려 주세요)

 

누군가 말했다. 기다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설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밤 자고 나서는 며칠 남았느냐고 물었던 기억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어디 설날 뿐이랴! 모든 명절이 다 그랬지. 오매불망이라 했던가, 밤잠도 자지 못하고 기다리던 운명의 그날이 가까워 지고 있는데, 온 세상을 충격과 경악 속에 몰아 넣은 사건이 터졌다. 경서중학교(?) 수학여행단을 태운 버스가 열차에 받쳐 수십 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한 건의 대형사고가 터졌다. 정확히 우리 또래의 학생들이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부모님이나 가족의 애통함이 오죽할까마는 우리들이 받은 타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라(교육청?)에서 수학여행을 금지시켰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우리들의 수학 여행도 취소되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쓰◇! ~"하고 투덜거리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오로지 수학여행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것이 없었던 15세의 철부지 소년이었다. 출발을 며칠 앞두고 학부형회의가 열렸다. 우리는 제발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드디어 그날 오후 종례 시간에 우리는 만세를 불렀다. 사실 30년 전의 기억이라서, 정말로 수학여행을 취소한 학교가 있었는지, 학교 당국이 실제로 수학여행의 취소를 검토했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그 때는 수학 여행을 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았다. 나도 사실 이 수학여행이 학창시절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게다가 끔찍한 사고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겨우 반 정도가 동참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여행 가기 전 수학여행 노래를 배우며 우리가 즐거워 했을 때 갈 수 없었던 친구들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네들의 아픈 심정을 몰라 주었던 우리의 무심함을 용서해 주시게! 그리고 30여년 사고로 숨진 또 다른 우리의 동기생들에게 늦게나마 애도를 표합니다.

 

====여기까지는 2003년 중학교 동기회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논산의 관촉사와 부여의 부소산 낙화암 고란사 군창지 등을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아산 현충사를 참배했다. 은진미륵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놀랐고 낙화암에 몸을 던졌다는 삼천궁녀의 애닯은 사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아산 현충사에서는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신 충무공의 영정 앞에서 잠시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였다.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이게 다였다.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에는 아직 어린 열다섯 살 소년이었으리라. 게다가 나는 배경지식도 갖추지 못했고 예나 지금이나 예술적 감수성은 맹탕인 샌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가는 곳마다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공화당 김종필 국회의장님의 덕분으로~>라는 칭송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엄청나게 넓고 깨끗하게 잘 꾸며진 현충사에 감탄을 하면서도 왜 절에 부처님이 없느냐고 의아하게 생각도 했었다.

 

명색은 이박삼일이지만 일박만 했던 부여의 여관에는 초크다마*1가 없는 형광등이 달려 있었다. 어쩌다 전등을 끄고 새로 켜면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보다 서너 살은 더 된 총각이 젓가락으로 형광등 구멍을 쑤시자 불이 들어왔다. 잘 때까지 불을 끄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나갔다. 하지만 개구쟁이들에게 그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밤 늦게까지 불 끄고 안 켜지면 또 부르고 화를 내고 욕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대형 사고가 난 후라서 그런지 정부에서 사고 예방에 무척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부여에서 논산 그리고 천안에서 현충사(아산) 사이를 버스로 이동할 때에는 꼭 경찰차가 안내를 했다. 선도하는 경찰이 마주 오는 차들을 향해 손짓을 하면 모두 비켜 났다. 우리는 개선장군이 된 기분이었다.

 

천안역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것도 잊을 수 없다. 오십여명 밖에 수용할 수 없는 좁은 식당에서 2백여명이 순서대로 밥을 먹었다*2. 배는 고픈데 우리 반은 골찌로 먹었다. 일부 친구들이 담임선생님 원망을 했다. 나중에 들으니 버스로 이동을 할 때 우리 반이 먼저 타서 좋은 자리를 차지한 댓가라고 했다.

 

천안역에서는 밤차를 탔다. 저녁 아홉시쯤에 우리가 탄 기차는 말 그대로 만원이었다. 남의 좌석에 기대기도 하고 통로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냥 퍼질러 앉아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김천역이 가까워지자 선생님들께서는 2~3십분전*3부터 기차간을 이동하면서 자는 아이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냥 두면 구미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천역에 모두 내린 것은 새벽 두시 쯤 되었던 것 같다.

 

기차 안에서 피곤하여 잠이 들려고 하면 이동판매원의 수레가 지나가면서 잠을 깨웠다. 그래서 누군가가 앞뒤칸을 연결하는 문을 잠가 버렸다. 문 열라는 고함 소리에도 모른 척하고 잠시 버텼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는 법 누군가가 문을 열어 줬다. 이동판매원의 표정이 험악했다. 누구냐고 악을 썼다. 우리는 모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옆에 계신 신사분이 대신 변명을 해 줬다.

“애들이 몹시 피곤해서 그러니 이해하시구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신사분을 째려 보며 한마디 던지고 지나 가셨다.

“나도 피곤하지만 먹고 살라고 이짓 합니다.”

 

김천역 대합실에서 두어시간 눈을 붙이고 다섯시경에 기차를 타고 상주역에 내리니 아침이었다. 여행이란 것이 편해서 즐거운 것은 아닐 것이다. 고생한 것도 지나고 나면 정겨운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기준에서 보면 참으로 무모한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이 기차에서 저 기차로 바꿔 탄 것이 3~4회 버스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 탄 것도 3~4회 그중에 밤차도 타고 새벽에 갈아 탄 적도 있으니 안전사고의 염려도 많았다. 그래도 무사히 다녀 왔으니 다행이었다. 철부지 학생들 인솔하여 다니신 선생님들 수고 많았습니다.

 

1)그 시절에는 “초크다마”라고 했는데 검색해 보니 “글로우스타터”라고 나옵니다.

2) 오십명 2백여명은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좁은 식당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먹은 것만 사실입니다.

3)2~3십분전부터도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2016.1.12 페이스북 그리고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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