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더불어

봉사활동

임재수 2024. 12. 25. 11:20
스물한살 때인 1976년 여름방학 때였다. [흥사단 대구아카데미]의 구성원으로 봉사활동을 간 곳은 동구 범물동이었다. 명색은 대구시지인데 전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고향 가리점과 비슷한 두메 산골이었다. 20번(?) 버스를 타고 지산동 종점에서 내려 한 시간 정도 걸어 가야하는 마을이었다.
 
범물분교(아마 본교가 지산국민학교)에서 교실 두간을 모두 차지하여 숙식을 해결했다. 분교장이었던 선생님(성함?)께서 주민들과 우리를 이어주고 이끌어 주셨다. 땅을 파서 물탱크도 만들고 수도관을 묻어서 상수도를 설치했다. 물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을 했다. 마지막에 꼭지를 돌리자 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순간의 감격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선배단우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땅을 파고 지게질을 하면서 노동의 소중함을 알았다. 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처지와 현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저녁이면 선후배가 모여서 나의 인생과 공동체의 미래를 주제로 영양가 있는 대화를 주고 받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물이 도착했다. 목이 마른 차에 물을 받아 마시려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찌르며 말렸다.
"지금 물을 마시면 막걸리 맛 없어요"
나보다 일년 후배인데 인생의 참맛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실 나는 산골마을 가난한 농사군의 자식이었다. 그때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배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 때 우리 집에서는 담배 농사를 지었다. 여름 방학이면 담배를 따서 건조실에서 말리는 한창 바쁜 시기였다. 집안 일을 도와야 하는데 봉사활동을 간다는 것이 도리에 맞는지 며칠을 두고 고민했었다.
 
"노동의 소중함"이나 "농민의 현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처지였다. 다만 저녁에 선후배가 모여서 나누는 "영양가 있는 대화"의 소중한 기회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님께 조용히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 아버님이 별세를 하셨다. 그래서 학창시절의 봉사활동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채영신과 박동혁이 활동했던 일제 시대에는 <농촌계몽운동>이라고 했다. 그것을 70년대에는 <농촌봉사활동>이라했고 언제부터인지 "농(촌)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계몽"이란 용어를 버린 것은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그리고 "봉사"란 말에도 <남을 위해 일한다>는 시건방진 태도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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