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더불어 52

앞산을 넘지 못난 꿈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끔씩 꿈을 꿉니다. 날개를 달고 온 동네를 거침 없이 날아 다닙니다. 그러다가 우리 동네를 가로 막고 있는 앞산 너머가 궁금해집니다. 그 산을 한 번 넘어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날아 오르다가 그만 넘지 못하고 깨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 앞산 며칠 전에도 넘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는 저쪽 오부 능선에 그리고 할머니 산소는 이쪽 오부 능선 쯤에 있어서 가끔씩 넘어 다닙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꿈속에서는 한 번도 앞산을 넘지 못했습니다 (2013.9.13 페이스북)

추억과더불어 2024.01.20

기억속의 갑진년

--갑진년부터 어릴 때 기억이 남아 이써! --믄대? 말해바! --이런 노래를 기가 따갑도록 불렀지! -----올개는 일하는헤 모두 나스자 -----세살림 일께우는 태양이 떴다 -----새로운 듯 부푼꾸믈 일손애모아~ --야 그건 1965년 그렁깨 을사년에 나온 노래다! --뭐? --"65년은 일하는 해"라고 불정역에 붙어 이써! --아 생각 낫다! 비름빡에 붓튼 묵은 달력! --그기 어때서? --그기예 갑진년이라고 남아 있었어! --그런데 갑진년 이야기가 왜 나오나? --오늘부터 갑진년이자나? --2월 10일 음력 설날부터 갑진년이여. --야, 대충 너머 가! --경자년을 21년 2월11일 자정까지 부리먹어 노코 머 대충? --잘났어! 정말! 불정역에 붙어 있던 [65년은 일하는 해] 신축년은 아직 4..

추억과더불어 2024.01.01

PC통신

"ATDT 01420" 이거 아시는 분은 구세대라고 하겠다. 386 도스 시절에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깔아서 전화 모뎀을 작동시키고 천리안에 연결할 때 사용하는 "명령어+전화번호"이다. 처음에는 천리안 내부에서만 자료를 올리고 내려받고 채팅도 하고 그랬다. 아 그러고 보니 함께 근무하시던 영어 선생님(손0호 선배님)께서 는 명령어를 직접 입력해서 인터넷에 접속하여 미국 하버드대학 등을 휘젓고 다니는 시범을 보여 주셨다. 하지만 영어가 짧은 처지에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넷스케이프에서 만든 "네비게이터"라는 웹브라우저를 구하여 웹서핑을 시작한 것이 98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근무하던 문경서중학교에 인터넷 전용선이 깔리고 전산망 관리자가 된 것이 99년 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내서중학교로 전출을 가서..

추억과더불어 2023.12.11

내가 일등!

그때는 월급을 현금으로 지급했었다. 은행에서 찾아온 돈을 행정실 모든 직원이 나서서 개인별 봉투에 맞추어 넣었다. 교무실에 근무하는 김양누나**까지 지원을 나간 것으로 기억한다. 전체 금액에 이상없는 것이 확인 되면 교무실로 연락이 왔다. "월급타러 오시라"고 그런데 첫 월급 타는 그날 나는 뜸을 많이 들였다. 웬지 모르게 낯간지럽고 쑥스럽고 기분이 묘했다. 수업 한 시간 더하고 또 한시간 더 미루다가 독촉을 듣고서야 행정실로 갔더니, "빨리 찾아가야 우리도 끝내고 마무리 하지요!"뭐 이런 짜증 섞인 핀잔이 돌아왔다. 그리고 한 이십년 지나고 난 뒤 옛날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첫월급날 그 쑥스러워 했던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김양누나**가 직접 교무실로 월급봉투를 갖다 주었다고 했다..

추억과더불어 2023.10.10

밭나락을 아십니까?

밭나락(밭에서 나온 벼)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면서도 "나락이 논에서 나지 밭에서 난다고? 에이 거짓말 하지 마슈!" 뭐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에서는 밭에서 나락(벼)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 쌀로 지은 밥도 먹어 봤다. 물론 논에서 나온 쌀보다는 거칠고 밥맛도 훨씬 떨어졌다. 그래도 보리밥보다는 엄청 좋았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검색해 보니 "산두" "산도"라고도 부른다고 나오네요.

추억과더불어 2023.04.15

영식이 앞으로 보내는 편지

산골 분교의 어려운 사정과 새 학교를 지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편지를 썼다. 5학년 때로 기억하지만 그 시기만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선생님들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썼는지 아니면 내 나름대로 썼는지 그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편지를 받아 볼 사람은 우리 또래의 어린이라고 들었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학교(건물)을 새로 지어서 이사를 갔다. 6학년이 되고 난 뒤 여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해 새로 부임해 오신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를 비웃었다. "영식이가 몇살인지 아냐? 너들보다 두 살 아래다. 어린애보고 그런 편지를 쓰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세월은 흘러 군복무 시절에도 그런 편지를 또 썼다. 레이건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편지였다. 가방끈이 긴 사람 불러서..

추억과더불어 2023.01.16

걔들도 노래를

그 시절에는 이런 풍문이 돌았다.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이미자씨의 목을 미국에서 사 두었다. 그분이 돌아 가시고 나면 목을 해부해서 노래 잘 부르는 비밀을 과학적으로 연구해 본다. 뭐 이런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말도 안 되겠지만 내 주변에서는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다. 학창시절 마지막 소풍은 72년도 봄에 갔었다 (가을부터는 교련복 입고 목총들고 가는 행군). 학급별 모임이 끝나고 학년 전체가 모여서 장기 자랑할 때 나는 경악했다. 동급생 하나가 를 원어로 그리고 온몸으로 불렀다. 그렇게 많이 흔든 것도 아닌데 몸짓 하나하나에 열정이 묻어 나왔다. 우리 말로 번역한 노래는 훨씬 뒤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걔들(서양 사람들)도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생존자의 목을 미리 ~]는 ..

추억과더불어 2023.01.14

크라운산도

물론 그 이전에도 과자는 있었다. "오오가다" 아마도 일본말의 잔재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 사탕도 충분이 맛이 있었고 실컨 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크라운산도는 맛도 환상적이었지만 여러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하얀 코팅지(? 아니면 기름 먹인 종이?)에 대여섯개씩 포장되어 있었다. 사탕과는 달리 빨아 먹지 않고 깨물어 먹었다. 그래서 금방 동이 나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 산도를 처음 맛본 것이 중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지금은 없어진 이안면 소재의 아천(?)중학교를 다녔던 이모 선배로부터 얻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농암까지 걸어가서 이안을 거쳐 함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의 일이었다. 그저께 두부 납품차 은척농협 하나로마트를 갔다가 우연히 봤다. 그 맛있는 산도가 [밋개도 ..

추억과더불어 2023.01.07

전기 이야기

옆방에서 자취하던 김0완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공부하다 불을 켜놓고 잠자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뭐 그런 일이 저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유달리 심했고 그래서 주인댁 마나님은 속을 많이 끓여야 했습니다. 대면해서 말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저에게 대신 좀 전해 달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드디어 어느날 저녁 가벼운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직접 본 이야기는 아니고 아주머니께 들은 변명 겸 하소연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또 불을 켜 놓고 자는 것 같더라. 코고는 소리가 들려 살짝 문을 열어 봤다. 방바닥에 큰 댓자로 누워서 자더라.들어가서 불만 끄고 나오려고 했다. 나오다가 캄캄해서 웃목에 냄비인지 그릇인지를 발로 찼다. 그런데 0완이 학생은 아는지 모르..

추억과더불어 2022.12.17

생알떡국

요즘은 찹쌀수제비라고들 부른다. 하지만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사는 우리들은 그것이 떡국인 줄 알고 먹었다. 방앗간에서 기계로 뽑아 얇게 썰어서 끓인 신식 떡국은 구경도 못했다. 국민학교 5학년인가 겨울방학 때 공검면 양정2리 고모님댁에 가서 처음 먹어 봤다. 그곳이 친정인 당숙모님따라서 걸어서 갔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새알 떡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찹쌀로 만든 수제비가 꼭 새알을 닮았다. 요즘과 같은 신식 떡국이 나오면서 두 가지를 구분하려고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측하지만 자신은 없다. 그 시절 고모님댁에서 먹은 떡국은 정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쇠고기 다져서 볶은 것에다 달걀 후라이를 썰어서 고명으로 얹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집에서라면 다락에 얹어둔 고명만 훔쳐 먹었을 것 같다. 오늘..

추억과더불어 202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