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더불어 52

우리에게도 수학여행은 있었다.

우리에게도 수학여행은 있었다. 추억과더불어 2020-06-14 15:35:11 잊을 수 없는 추억, 우리들에게도 수학 여행은 있었다. 요즈음은 형편이 넉넉해져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여행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들에게는 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었다. 1970년 10월, 기껏 해야 친척집 나들이가 고작이었던 우리들에게 수학여행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 시간에 ‘수학 여행의 노래’를 배우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지금의 학생들도 여행 가기 전에 노래도 배우고, 조편성도 하고 장기 자랑 준비도 한다. 그러나 그 시절 “상중 건아”들에게는 우리만의 노래가 있었으니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상중건아”가 아닐 것이다. “천봉산 울안을 잠시 벗어나..

추억과더불어 2022.11.04

목욕이야기

겨울에는 추억과더불어 2019-12-25 21:46:38 열다섯 살 그러니까 1970년 봄에 처음으로 목욕탕이란 곳을 가 봤다. 그때 [서부지구학도체육대회] 그리고 [경상북도학도체육대회]라는 두 개의 큰 행사가 내고장 상주에서 연거푸 열렸다. 만만한 2학년이었던 우리는 오전 수업 끝난 후 거의 매일 집단체조 연습을 했다. 이른 봄 쌀쌀한 날씨에 반바지인지 검은 팬츠인지 헷갈리는 것을 입고 매일 운동장으로 나갔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눌러붙은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지저분하다. 돈 50원이 그리 없느냐"고 옆짝궁이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찾은 목욕탕이었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뜨끈뜨근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신나게 밀었다. '국시꼬랭이'가 한도 없이 밀렸다. 점잖은 신사분이 탕 ..

추억과더불어 2022.11.04

가장오래된 선물

가장오래된 선물 추억과더불어 2019-03-18 16:05:07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선물이다. 그 이전에는 주고 받은 기억이 없으니 내 생애 최초의 선물이라고 짐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부모님께도 드린적도 받은 적도 없는 것 같다. "밥 미기주고 남 못가는 학조 보내 주만 대찌 무슨 선물" 입에 담으시지는 않았지만 살아 계셨으면 이런 말씀 하셨을 것 같다. 이런 생각으로 아이들 키우다가 옆사람한테 원망도 좀 들었다. 올리고 난 뒤 생각하니 중대한 착각이 있었다. 큰아부지께서 입학을 축하하는 의미로 맞추어 주신 교복이 있으니 그것이 최초의 선물이 되겠다. "큰아부지 정말로 죄송합니다."

추억과더불어 2022.11.04

가방끈만 길었지

가방끈만 길었지 추억과더불어 2019-02-16 18:20:51 생애 단 한번의 낙방은 1977년 봄에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장교가 되고 싶어서 학군단에 지원했던 것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장학금에 눈이 멀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년간 장학금을 받고 그만큼 더 복무하는 조건이었다. 가입단 훈련이란 것 참으로 힘이 들었지만 그 달콤한 미끼를 생각하며 어찌어찌해서 극복했다. 그런데 정식 입단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나는 제외 되었다. 신원 조회에 걸렸는지 왜소한 체격 탓이었는지 그 이유도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소령인지 중령인지 나를 부르더니 "자네 같은 체격이면 아마 병으로도 입대하지 않고 면제 받을 것"이라고 달랬다. 허탈한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좀 악착같이 버티지 않고 순순히 ..

추억과더불어 2022.11.04

자동차이야기

자동차이야기 추억과더불어 2018-12-29 23:27:06 처음으로 바퀴달린 것을 타 본 것은 “구루마”였다. 물론 우리 마을에는 자전거도 없었고 우마차도 없었다. 사과 궤짝이나 소주 궤짝 바닥 아래 측에 3~4CM 굵기의 의 길고 둥근 막대를 앞뒤로 고정시키는데 이것을 심보라고 했다. 그리고 굵은 통나무를 2CM 정도로 짤라 가운데 구멍을 뚫어 보의 양 끝에 끼우면 동태(바퀴)가 되었다. 앞에 끈을 달고 우리 같은 꼬맹이 하나 쯤은 태워서 끌고 다녔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가득골(우리 동네 위쪽 골짜기)에서 산판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무를 실어 내기 위한 “재무시”라는 게 매일 같이 드나들었다. 우리 꼬맹이들은 그 차 한 번 타 보고 싶어서 매일 같이 그 뒤를 따라 다녔지만 한 번도 못 타봤..

추억과더불어 2022.11.04

대변검사

대변검사 추억과더불어 2018-12-04 12:33:47 "돌쇠야 학교가자" 옆집에 사는 친구 개똥이가 불렀다. 그런데 돌쇠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삽짝문을 열고 들어 서자 돌쇠네 할머니가 턱짓으로 모퉁이를 가리켰다. 거기서 돌쇠는 엉덩이 까고 신문지위에서 낑낑거리고 있다. "식전부터 저카고 있다. 안 나오는 걸 왜~" "오늘 안 내만 일주일 벌청소 시킨대요" "멀 내는디" "대변 봉투" "거기 먼데" "긍께 지가 눈 똥을 봉다리에 다마 내만 읍내 가지고 가서 검사한대요, 아차 지각하만 안 대지. 돌쇠야 나 먼저 가여" 그리고 한참 뒤 돌쇠는 성공을 했다. 달걀보다 조금 작은게 신문지에 깔렸다. "할매~ 나 그패서 그냥 강께 봉창 우에 성냥각하고 비닐 봉다리 있응께 담아서 ~" "응 그래 아라쓰니 얼렁가..

추억과더불어 2022.11.04

머 니가 국시를

머 니가 국시를 추억과더불어 2018-12-03 20:49:10 "점심 주래?" "오는 길에 먹어써요" "그래, 머 머건는데?" "손국시 한그륵 머거써요 " "머 니가 국시를?" "마시짜나" "빌이리 다 인네" "내가 국시 먹으마 안대?" "국시 미끼 시러 투정하다 밥 그륵 뺏기노코 ~" "음마는 애들 듣는데서 쪽 팔리구로~" "챙피항거는 아는구먼" "그래도 오빠 한테는 찬밥 한 그륵 따로~" "마자 큰집에서 고깃국 끼리만 오빠만 따로 부르고~" "너들까지 왜카나, 그러고 보니 내가 너들한데 참 빚이 많다" 오늘 안과 진료차 대구 다녀 오다가 지천 식당에 들러 우리 부부 손국시 한 그릇씩 먹었습니다. 옆 사람은 예전만 못하다고 투덜거렸지만 저는 여전히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투정하다가 아버님께 밥그릇 빼앗..

추억과더불어 2022.11.04

추억의 흔적

추억의 흔적 추억과더불어 2018-10-05 22:11:47 삼십육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딱 요 무렵이었습니다. 해병1사단에서 호국문예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과 남긴 추억의 흔적입니다. 명색은 문예반 지도교사였지만 제대로 도움을 준 기억은 없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들 이제는 오십을 넘긴 초로(?)의 신사들이고 이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추억과더불어 2022.11.04

전화이야기

전화이야기 추억과더불어 2018-07-21 07:48:13 지금이야 집집마다 전화가 있습니다. 아니 휴대 전화를 들고 산에 올라 가서도 연락이 됩니다. 하지만 전화가 귀하던 시절 전화라는게 부의 상징이었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처음 접하게 된 전화는 호출 전화라는 것이었습니다. 1972년 1월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고 난 후입니다. 상주읍내 사는 김0중이라는 친구와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려는 상의를 하러 상주읍내까지 나가려고 하다가 호출전화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침 먹고 이십여 리쯤 떨어진 면소재지에 있는 은척우체국까지 두 시간 쯤 걸어 가서 신청을 했습니다. 창구 직원이 상주우체국 직원과 통화를 하였습니다...

추억과더불어 2022.11.04

나는 명절이 좋다

나는 명절이 좋다 추억과더불어 2018-07-21 07:41:47 명절은 참으로 즐겁고 신나는 날이었다. 우선 먹을 것이 푸짐했다. 알록달록한 과자 고기 과일 등 평소 구경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아주 어릴 때는 차례 상에 얹힌 것들 먹고 싶은 생각에 침을 꼴깍 삼키며 차례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조상님들 차례상에 올리는 것보다 더 고급스러 것을 먹을 때도 많다. “저들만 맛있는 거 먹고”라는 생각이 들어 올리려고 하다가 “예전에 올리지 않던 않던 것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올릴까 말까 고민하기도 한다. 명절이 다가 오면 새 옷도 얻어 입었다. 설(추석)빔을 얻어 입고 같은 또래들과 만나서 내 것이 더 좋으니 네 것은 어떠니 하고 서로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날 입으라고 사 둔 새 옷을 그..

추억과더불어 2022.11.04